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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18. 2022

가족의 완성_EP3

탱화, 완성

2주 만에 돌아온 박타푸르는 네와르인들의 새해 축제로 우리가 머물 방 한 칸 조차 구하기가 힘들졌다. 사원에 모셔져 있던 신들은 가마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모든 사람이 매일 제물을 바치고 색색의 염료를 뿌려대는 통에 조용하던 마을에는 관광객도 많아졌다. 인파를 뚫고 도착한 도자기 광장은 평소보다 소란했지만 우리 화실은 여전히 아늑하고 따듯한 공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아살리가 보이지 않는다. 쉐딩 작업을 담당했던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카타르로 갔다고 했다. 네팔에서 최고의 직업은 해외로 나가 외화를 버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은 언어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갈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편에 속했고, 카타르나 중동의 부유국들은 시험 없이도 비자 문제만 해결되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화실 사람들은 우리가 한국에서 버는 연봉을 몇 번이고 물어봤다. 한국에 일하러 간 친구들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얘기를 늘어놓으며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찬드라의 딸도 곧 한국으로 갈 것이라 했다. BTS 팬이라던 그녀의 진짜 꿈은 화가였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몇 년간 일 할 계획을 세웠다. 한국에서 네팔로 온 우리는 탱화를 그리겠다 낑낑댔지만 이들 눈에는 복에 겨운 한국인들로 보였을 것이다.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예술가의 삶은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일이 확실했다. 대체 이 작업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채색은 연습 없이 캔버스에 바로 칠하면 됐지만 패턴 작업은 그리기 전에 흰 종이에 무한으로 반복되는 연습을 한 뒤 찬드라의 허락이 있을 때 캔버스로 옮겨 그릴 수 있었다. 파도와 불꽃, 가부좌를 튼 사람의 모습, 점으로 이어진 장식들. 하나의 패턴이 끝나면 또 다른 패턴을 종이에 그렸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탱화에 다 보였다. 네 면의 공간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중심과 가까워질수록 다른 문양으로 채워졌다. 명상으로 친다면 우린 무아지경에 빠져들어야 했지만 무아지경 입구쯤에 들어가는 순간 다리가 저렸고 허리가 아팠다. 안나푸르나를 걸으며 마음을 다잡고 왔다 생각했지만 하루 7시간씩 하는 작업에는 또 피로가 몰려왔다. 뭉아와 안주는 인내심 없이 몸을 뒤트는 우리를 보면여전히 우스워했다.


패턴을 그려 넣는 작업도 끝이 났다. 쉐딩 작업으로 바탕색의 명암을 잡는 일이 남았다. 나는 부를 상징하는 주황색을, 길상이는 건강을 뜻하는 파랑을 택했다. 모든 디자인은 같았는데 배경색이 달라지면서 완전 다른 탱화로 보였다. 이 쉐딩 작업은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단계였다. 실력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탱화의 그림들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다른 그림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는데 이 명암 때문에 초보자가 막 그린 탱화라는 것이 티가 났다. 찬드라의 그림을 계속 보고 우리 그림을 비교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차피 한국 집에는 내 그림만 걸릴 테니 아무렴 어때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거의 막바지 작업인 금박만을 앞두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졸리다.


“진짜 금도 있고, 가짜 금도 있어요. 어떤 걸 할래요?”

진짜 금은 가격이 비싸고 금박을 입힌 뒤 한번 더 긁어내는 샤이닝 작업이 필요했다. 우린 반짝이는 작업이 필요 없는 가짜 금으로 마지막 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찬드라는 금 알갱이를 구해와 풀에 함께 끓여 금색 물감을 만들어 줬다.


 붓에 금을 묻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금보다 물을 많으면 캔버스에 붓이 닿자마자 물이 번졌다. 가짜 금이긴 했지만 연습 할 양이되지 않았다. 찬드라의 딸이 보다 못해 금장식의 어려운 패턴을 그려주고 찬드라는 가장 작고 복잡한 동식물을 네 귀퉁이 사원 안에 넣는 마무리 작업을 해줬다. 머리카락 같이 얇은 붓을 들고 점을 찍고 소와 말을 거침없이 그려 넣었다. 30년의 노하우가 보였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찬드라, 에라람로!” (very good!)

우리는 한 달 만에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완성된 탱화를 받아 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졸업작품


20살이 되던 해 엄마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클리쉐처럼 그 누구도 아플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던 엄마였다. 서울로 항암치료도 혼자 받으러 다닐 만큼 씩씩했다. 우리 가족은 그 모습을 걱정하긴 커녕 안도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것으로 착각을 했다. 착각이 깊어져 모두가 진실을 외면 했을 때, 잘라냈던 암은 다른 곳으로 번져 손쓸 새도 없이 엄마의 모든 살을 갉아먹었다. 하루하루 까맣게 변하는 엄마의 피부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모습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그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삶의 마지막 무렵 엄마가 자주 했던 말이 있었다.

“여행을 다니고 싶었는데,,, 너희랑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때는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어. 너희한테는 사랑은 못 주고 돈만 줬는데 너희는 저절로 커지더라고, 그게 맞는 줄 알았어. 엄마가 죽으면 여행 다닐 수 있게 흐르는 물에다 뿌려줘야 해. 가고 싶은 곳이 많거든”

사람들은 건강을 잃자마자 그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 엄마는 책임과 일상에 매여 포기해야 했던 일들,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밥벌이가 중요했던 것이 마음이 짐이었다. 사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엄마 아빠는 없었다. 운동회, 졸업식, 수능을 치던 날, 대학에 가던 날, 모든 날에 두 사람은 꽃집을 지켜야 했다. 돈을 많이 벌수록 우리는 더 멀어져야 했던 것이다. 부자가 될 만큼 큰돈을 번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오빠에게 탱화를 보내기로 했다. 이 과정을 오빠는 상상도 못 하겠지. 내가 잘 있다는 안부를 탱화로 보여주고 싶었다.


네팔을 여행하는 내내 나는 가족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 어디든 여행을 하고 싶었던 엄마, 아빠와 함께 붓을 맞잡고 탱화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엄마도 네팔에 있다는 것이었다. 물을 어디든 흐르고 떠다니다 다시 땅으로 오게 되니 박타푸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빠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나와 함께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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