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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18. 2022

사막 대탈출_EP2

결혼 기념이란 핑계

 “요기, 다른 일 있나요? 우린 사막에서 일 못할 것 같아요. 잘 못 생각한 것 같아요”

반나절만에 백기를 들고 투항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막에 둘만 있다가는 큰 싸움이 나거나 오아시스를 찾아 탈출하다 큰 변을 당할 것이 뻔했다. 길상이도 사막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로 보였다. 아저씨는 다른 업무를 제안한다.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요? 엑셀로 인보이스 만드는 일을 해주겠어요?”

“당연하죠! 그건 쉬운 일이죠!”

컴퓨터쯤이야. 전 세계 최고의 컴퓨터 보급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온 우리에게 엑셀?! 식은 죽 먹기인 일이지.


 우린 호텔로 돌아왔다. 남편은 더위에 지쳐 햇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로비의 소파에 늘어졌다. 나는 인보이스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좁은 공간의 리셉션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한 대와 에어컨이 있는 초소형 미니 사무실이다. 이 큰 로비에 에어컨을 틀려면 전기세가 어마어마할 테니 주인만을 위한 냉방 칸이자 힐링의 공간이었다. 차가운 공기 덕에 이 세상은 아직 살만했다. 사막에서도 그늘 안으로만 들어가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정도긴 했지만 에어컨이란 현대 문물의 쾌적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요기가 부탁한 일은 무척 간단하다 못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날짜별로 투숙객의 인보이스 몇 장만 작성하면 되는 일이었다. 손님이 많으면 모를까. 에어컨 밑에서 최대한 천천히 업무를 하려 애썼지만 아쉽게도 금방 끝나고 말았다.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다.

적성에 맞는 오피스 업무

요기 아저씨는 우리가 쉴 방을 줬다. 이 건물의 가장 위층인 4층 옥상을 전체로 쓰는 큰 도미토리였는데 20명은 족히 잘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침대가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손님은 우리밖에 없으니 화장실 대기할 걱정은 내려놓는다. 잘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으로 기뻐하려던 찰나 이곳에도 뜨거운 공기가 목을 탁 친다. 낮동안 한껏 달아오른 옥상의 열이 온몸을 감쌌다. 대체 바깥의 사막과 다른 것이 뭐지? 냉방시설이라곤 각자 침대의 머리맡에 있는 선풍기 한대가 전부였다.

지난밤도 창문을 열고 다니는 침대버스 덕분에 밤새 먼지를 마시며 왔는데, 아침은 말도 안 되는 사막에 저녁은 더 말도 안 되는 숙소라니,, 이렇게 힘든 이틀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오래된 부부의 감으로 길상이의 짜증은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온도가 떨어지겠지” 나도 모르게 길상이 눈치를 보며 입을 뗀다. 남편은 ‘왜 이런 곳으로 날 데려왔냐…’라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다 이내 기운을 잃는다.

“우리가 또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저녁이면 금방 시원해질 거야”

“괜한 경험…” 남편은 입을 삐죽인다.

난 못 들은 채 하고 최소한의 옷만 입고 샤워장으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뜨거운 열수가 콸콸 쏟아졌다. 물을 한참 틀어 놓고 뜨거운 물을 빼 내려했는데 이러다가는 이 집 물을 다 쓰고도 냉수는 구경도 못할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차가운 물이 나오면 부잣집이라더니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뜨거운 물을 온몸에 끼얹음과 동시에 펄쩍펄쩍 뛰어본다. 그럼 조금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 요란스러운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긴 하루 덕에 기력이 다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깨달았다.

“야 길상아!!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다?! “


세계여행을 시작한 이후 맞이하는 첫 결혼기념일이었다. 결혼기념일을 이 뜨거운 도미토리에서 보낼 순 없었다. 근사한 곳은 아니더라도 에어컨 밑에만 있을 수 있다면 최고의 결혼기념일로 기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1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 가 요기 아저씨에게 근처 가볼 만한 근사한 곳이 있는지 물었다.

“분위기 좋은 식당이나 공연도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근처에 그런 곳이 있을까요?”

“락슈미 궁전이요. 음식이 꽤 비싸긴 하지만… 여긴 옛날 왕이 살던 궁전인데 지금은 호텔로 개방되어 있어요. 멋진 곳이니 이곳으로 가봐요. 라자스탄은 밤이 아름다운 곳이니까.”

비카네르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까지도 왕이 따로 있던 도시이자 향신료 무역을 하던 아랍상인의 길목이었다. 이곳도 왕궁에서 호텔로 바뀐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햇수였다. 로열패밀리가 살던 곳은 누추한 한국 관광객도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내부에 식당도 있다고 하니 돈이 얼마건 간에 근사한 식사도 할 참이었다. 오늘 내내 뜨거운 사막을 다니느라 고생만 했으니 서로 잘 견뎠다고 칭찬을 해줘야 마땅했다.

릭샤를 타고 넓게 트인 도로 위를 한참 달렸다. 멀리서도 궁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추한 곳에서 왕궁으로 향하는 호박마차를 탄 신데렐라의 기분이 들었다. 사암으로 지어진 불그스름한 궁전은 조명까지 더해져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아름다웠다. 촉촉한 잔디는 어찌나 관리를 잘해 놓았는지 비현실 적이었다. 그 위로 수컷 공작이 화려한 깃털을 펄럭이며 한가롭게 놀고 있으니 딴 세상으로 온 기분이 들었다. 공작은 평생을 궁전에서 살았으니 바깥세상의 뜨거운 사막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20인의 도미토리에서 왕궁이라니, 오늘 하루가 너무 드라마틱한 나머지 헛웃음이 났다.

정문을 지키는 직원들 사이로 입장을 했다. 깔끔한 호텔 유니폼은 기품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며 환영한다는 인사를 한다. 매너 좋은 직원들 덕에 입장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돌 위에 아름답게 조각된 기하학무늬에 눈이 휘둥그레 진다. 천장과 벽면을 몇 번씩이나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우아하고도 아름다웠다. 갓 시골에서 상경한 촌뜨기들처럼 눈이 핑핑 돌아가는 세계였다.

“식사를 하러 왔어요. 레스토랑으로 안내해 주세요”

직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홀은 인도보다 유럽에 가까웠다. 궁궐 주인의 취향이었을 것이다. 메뉴판에서 적당히 비싼 음식을 주문해 놓고 1층 궁전 내부를 구경했다. 각각의 방들은 호화로움의 끝이었다. 벽면 가득 걸린 흑백사진은 100년 안 팍의 역사적 기록들이 었는데 주로 왕족의 사냥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당구대가 있는 방은 사냥한 동물들을 박제하여 방 안을 빈틈없이 장식해 놓았다. 동물들의 죽은 눈을 쳐다보는 게 께름칙했다. 지금 같으면 비난의 대상이었을 텐데,,  그 당시는 이런 잔인함이 놀이문화였을 것이다.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과시하는 것이 당연하던 역사였다.

호텔 더 깊숙한 안쪽으로는 사암의 벽돌 색과 대조되는 파란 물결의 수영장이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수영장이라… 우리는 정말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었다. 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 물에서 헤엄을 친다면 완벽한 밤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식사가 곧 준비될 것 같아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당 정원 한편에서는 라자스탄의 전통 공연이 막 시작되었다. 타블라를 치는 소리에 피리소리자 얹어졌다. 검은 베일을 한 무희가 뱅그르르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치마가 팽이처럼 돌아가며 몸보다 큰 원을 만들어 냈다 손님은 아직 한 명도 없다. 남편과 둘이서 시원한 맥주를 연거푸 마시며 그 춤에 빠져든다. 라자스탄에서 신의 축복이 도착하기엔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이곳의 신조차도 뜨거운 열기가 식은 밤이 되어야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결혼식과 같은 파티나 축제도 모두 밤이 되어야 열렸다. 낮에 축제를 했다가는 사람은 고사하고 파리조차 오기 힘들 것이다.   

‘그래, 아라비안나이트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낮에 있었던 일은 새까맣게 잊었다. 하지만 이 짧은 환상이 끝나면 20인 도미토리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화려한 무도회에 왕자와 춤을 추다가 12시가 넘으면 결국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파스타를 천천히 음미하며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남편과 나름 특별한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위로하며 궁전을 나올 때쯤 이제야 손님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도, 손님도 늦은 밤이 되어야 보습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너무 일찍 나온 우리는 호박마차 릭샤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다. 신의 축복도 이곳은 비켜가는 것일까? 관광객이 없는 비수기이니 당연하다 했지만 자이살메르는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우린 도미토리로 올라가서 잘 준비를 한다. 유일한 냉방기기인 선풍기를 틀었지만 뜨거운 바람만 얼굴을 때린다. 시원해 지기를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은 없다. 아침에 만났던 다리가 세 개뿐이던 이 집 개 달걀도 더위에 지친 것인지, 인기척이 그리웠는지 우리 방으로 들어온다. 녀석은 성큼 내 침대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더니 선풍기 바람을 독차지한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지? 내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인도의 개는 장유유서, 질서의식도 없단 말인가! 나도 너무 덥단 말이야! 남편은 질색을 하며 개를 달래며 쫓으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놈에 개새끼가!!”

달걀의 습격


내가 큰소리로 화를 내니 그제야 사람 소리가 무서웠는지 자리를 옮겨 남편의 침대로 간다. 남편은 질색을 하지만 달걀과 함께 선풍기 바람을 한참이나 쐰다. 그래도 이곳의 온도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개도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우리만 남겨둔 채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1층의 타일 바닥이 훨씬 시원한 걸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스포츠 타월 두 장을 물에 적셔 상반신 한 장, 하반신 한 장을 덮고 겨우 잠을 청했다. 그 타월도 이내 뜨거워져 몇 분마다 계속 뒤집어 줘야 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잠에 들지는 못했다. 우린 결심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슈퍼에 가서 시원한 콜라를 마신 다음 아저씨에게 에어컨 있는 방으로 바꿔달라 할 것이다. 이틀 내내 잠을 편하게 못 잤더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잠을 잔 것인지 빨래를 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새벽 6시가 되었을쯤 밖으로 나가 콜라 한 병씩을 사 먹었다. 거리는 사람 대신 소들만 서성이고 있었다. 새벽 공기는 상쾌했다. 이제 요기 아저씨가 일어나기만 기다리면 된다.

“요기, 우리 간밤에 잠을 못 잤어요. 도미토리가 너무 더웠어요”

“냉방기 안 틀었니?”

“그게 뭔지,, 냉방기가 뭐죠?”

이제 와서 방 한편의 냉방기를 못 봤냐며 받아치는 아저씨가 괘씸했다.

“그걸 틀면 안 더운데,,, 아니면 이방을 쓸래?”

라며 요기 아저씨가 보여준 방은 곰팡이인지 벽지가 시커먼 색깔인지 알 수 없는 창고 방이었다. 호텔방이 이렇게 텅텅 비어 놀고 있는데 우리에게 방 한 칸을 못 주는 것인가 싶어 또 한 번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우리는 여기 못 자요. 방이 주기 싫으면 우리도 일 할 수 없어요. 우린 나가겠습니다.”

그래도 방은 바꿔줄 수 없다고 한다. 워크 어웨이는 노동력과 숙식을 교환하는 프로그램인데 아저씨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불평 없이 창고에서 먹고 자며 시키는 대로 일 해줄 직원을 고용하고 싶어 보였다. 우리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당장 짐을 싸서 나가겠다 짐을 챙겨 내려오니 그제야 다른 방을 보여준다. 요기는 사과를 하며 우릴 막아섰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결심이었다.


“길상아 얼른 나가자”

길상이는 환하게 웃으며 배낭을 멘다. 우린 락슈미 궁전으로 다시 한번 향했다. 파란 잔디를 지나 공작새에게 인사를 하고 호텔 직원에게 아는 척 인사를 했다. 오는길 릭샤 안에서 급하게 예약한 방으로 안내받아 올라갔다. 에어컨이 달린 방이었다. 문명아! 그동안 잘 있었니!!


사막 사파리는 하루 밤 만에 탈출했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세계여행이래 처음으로 근사한 호텔에서 수영을 하며 2박 3일을 보냈다. 우린 다시 한번 몽골에서 만난 프랑스인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더 잘 된 일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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