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지 하도 오래되어 빗물을 받아쓰던 식수탱크에도 물이 동났다. 호수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은 하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물을 담을 수 있게 생긴 통이란 통은 모두 들고 학교로 가져간다. 학교에도 물이 필요하니 물을 긷어다 주고 집으로 가면 또 물을 길어야 한다. 그래도 이곳은 섬이라 물을 마음껏 길어다 쓸 수 있으니 나은 편이다. 내륙은 깨끗한 물을 얻기위해 나귀를 타고 우물을 찾아가거나 반나절 넘게 걷는 일도 예사라고 했다. 음팡가노에 온 첫날 폴은 “집에 물탱크가 있나요?” 물었다. ‘없다’라고 대답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당황해 한국의 상하수도 시스템을 설명하니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탱크가 왜 그렇게 중요했었는지 우리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매일 호수에서 샤워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집안의 수도꼭지 물은 틀어볼 생각조차 안 한다. 어차피 수도꼭지는 무용지물이다. 한국에서 편하게 사용하던 모든 것들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놀라는 일이 많다. 강물에서 샤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한다. 점점 이 일도 익숙해져 크게 귀찮지는 않았지만 편리한 생활이 그립기는 했다. 기계가 해주던 일을 직접 하려니 하루가 더욱 바빠졌다.
고등학생 아이들이 떠난 빈자리가 허전해 몸서리칠 때쯤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모금에 참여했던 한 부부가 음팡가노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남편과 벌려놓은 일들이 조금 버겁기도 힘들기도, 지루하기도 했었다. 모국어를 함께 쓸 수 있는 지원군이 온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었다. 사제들도 학교에 가고 없어 마침 집에 빈방이 하나 생겼다. 신부님께 한국 봉사자들이 더 와도 되는지 물었다.
“당연하죠, 여긴 한국인의 집인걸요.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든지 환영이에요.”
오랜만에 섬을 빠져나와 준과 리를 만났다. 선한 인상에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커플이었다. 열 시간이 넘게 나이로비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는 부부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장기 여행자에게서 느껴지는 여유까지.
신부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환영해요. 난 음 팡가 노 성당의 신부 케빈이에요. 준의 직업은 뭐예요?”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부부 여행자들을 만나면 제일 궁금한 것이 그들의 전 직업이다. 준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목사예요”
나는 목사라는 영어단어조차 나는 알아듣지 못해 한국어로 다시 물어봐야 했다. 목사님이라니!
개신교와 천주교의 대 통합쯤 되는 일이다. 준은 목사님, 리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했었다. 불교신자인 우리는 한국에서 목사님을 가까이 만나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린 서로 다른 종교지만 성당에서 함께 지낼 일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세계평화도 이렇게 간단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종족, 종교, 인종, 지역, 우리로 구분하고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적이 된다. 대체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음팡가노 성당에서는 모두가 ‘우리’였다.
뭍으로 갈 때는 셋이었지만 섬으로 돌아올 때는 다섯 명이 되었다. 둘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섬에 발을 디뎠다. 마을을 구경시켜주기 위해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새로운 무숭구를 발견한 아이들은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무숭구, 하와유, 무숭구”
우리는 그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 대충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데 준과 리는 아이들의 관심에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고작 20일 남짓 넘었다고 우리는 이미 사람과 풍경에 익숙해졌다. 준과 리의 온 마음을 다하는 몸짓 때문인지 그동안 놓쳤던 섬의 아름다움이나 아이들의 웃음이 다시 보이기까지 한다. 학교에 다다르니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 한 무리가 몰려든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여학생들은 운동장이 떠나가라 까르르 웃으며 두 사람을 환영했다. 엉덩이를 실룩이며 춤을 추는 아이들의 뜨거운 반응에 이 부부도 놀란 표정으로 박수를 친다.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남편과 나는 벌써 매너리즘에 빠진 것일까?
“학교도, 아이들도 너무 이뻐요.”
준과 리의 눈에는 사랑이 넘쳐났다.
다음날 아침, 우린 아침을 챙겨 먹고 포리지를 만들기 위해 물품들을 챙겨 공터로 향했다. 네 명이서 할 만큼의 일은 아니라서 나는 그늘에 앉아 일하는 셋의 모습을 지켜봤다. 나름 경력직의 여유랄까? 인턴직원이라도 온 듯 이 홀가분한 기분은 뭐지?
넷이서 쉬엄쉬엄 교대로 죽을 저어주니 팔도 덜 아팠다. 새 무숭구들이 와서 긴장을 했는지 아이들은 오늘따라 말도 잘 들었다. 늘 엄하게 대하는 나와는 달리 준과 리는 사랑 듬뿍한 표정과 행동으로 대하니 녀석들은 이내 말을 잘 따랐다. 질서 정연하게 서로 밀지도 않고 줄을 서있는 모습에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로 희한한 일이다. 남편과 둘이서 배식을 할 때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준과 리를 보니 내가 지금껏 아이들을 너무 엄하게만 대했나 싶을 정도였다. 목사님이란 직업에서 나오는 인자함, 사회복지사의 따듯한 성품일까?라고도 생각했지만 아마 이 부부 자체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따듯함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의 회초리가 무색해졌다. 준과 리가 있는 동안은 회초리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슬그머니 숲으로 던져버린다.
저녁시간, 신부님은 또 다른 봉사자가 올 것이라 했다. 방도 없는데 어디서 머무르나 걱정했는데, 이미 성당 옆 한편에 봉사자를 위한 침대를 하나 들여놨다 했다. 케빈은 성당에 봉사자들 덕에 일손을 충당할 수 있는 워크 어웨이에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봉사자들이 많이 와서, 어느 정도 시스템이 잡히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나, 건물을 짓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요. 의사가 오면 더 좋고요”
신부님이 당장 이곳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워크 어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선착장과 가장 가까운 큰 마을이었는데 이곳 외에도 작은 마을의 몇몇 단체들이 이미 워크 어웨이를 통해 많은 외국인 지원자들을 모집해 화장실이나 집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부님은 그보다도 교육이나 의료서비스, 물품을 지원해줄 외국 기관을 찾도록 도와줄 봉사자를 모집하고 싶어 했다. 일손도 부족하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사실 누구든지 와주기만 한다면 대 환영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워크 어웨이 신청을 했던 모든 곳에서 하나같이 긍정적 답변을 보낸 것이 이해되었다.
“이번에는 어디서 오는 봉사자예요”
“터키예요”
터키면… 무슬림일까? 성당에 모든 종교가 다 모이게 생겼다.
무라트는 활기가 넘치는 남자다. 한국의 수박농장에서 워크 어웨이로 여행한 경험이 있었다. 케냐의 작은 음팡가노 섬에 한국인이 네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나조차도 이 사실에 놀라운데 그는 오죽할까. 무라트까지 봉사자가 다섯이나 늘어났다. 제일 신이 난 사람은 유니스다. 사람이 많으니 한 번씩만 식사 당번을 해도 본인이 요리하는 일은 훨씬 덜 수 있었다. 아침은 빵에 차 한잔이면 해결되니 신경 쓸 일이 없지만 매 끼니 여섯 명에서 열 명의 점심과 저녁을 하는 일은 여간 수고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돌아가며 터키음식과 한국음식을 만들었고, 이곳의 주식인 우갈리(밀가루를 물에 풀어 떡처럼 끓여낸 음식)와 스코마위키(케일을 볶은 음식)을 먹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우리도 한국음식과 케냐의 음식에 조금 질려 갈 때쯤 무라트가 등장해 레시피가 다양해지니 식탁은 풍성해졌다.
준과 리의 탕수육
터키의 파프리카 요리, 한 식탁에 모여앉은 네 종교
무라트는 무슬림은 아니지만 무슬림이 계율은 지킨다. 돼지고기나 술은 먹지 않았다. 성당 식탁에 불교, 무신론자 무슬림, 개신교가 함께 모여 밥을 먹으니 이만한 우연이 있겠냐며 모두들 기분이 묘했다. 종교 갈등은 전혀 없었다. 국적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것처럼 종교도 다른 것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전직 카메라 맨이었던 무라트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컴퓨터 수업을 가끔 해 줬고 성당 주변 청소나 이곳을 주기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단체들을 찾아 주는 일을 도왔다. 각자 재능도 달랐다.
준과 리는 우리와 같은 일과를 보냈다. 오전에는 포리지를 끓이고 오후에는 페인트를 칠했다. 조금씩 칠하기 시작한 페인트는 어느덧 끝이 보였다. 젯소 위에 노랑과 연두색을 칠한 다음 “jesus loves you”라는 큼지막한 글씨를 양쪽에 그렸다. 벽화를 그려 본 적은 없지만 성당 건물에 이것보다 잘 맞는 글귀도 없을 것이었다. 넷이서 하는 일이니 속도가 붙어 작업이 훨씬 빨랐다. 여기저기 미사를 보러 다니느라 바쁜 신부님은 오랜만에 우리의 작업장을 찾았다. 반신반의했던 그도 화사한 색깔에 깨끗하게 변한 벽을 보고 깜짝 놀라 한다.
“세상에!! 당신들 전문가들이었네요! 이렇게 멋지게 해 낼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바깥벽 작업까지 해보는 건 어떨까요?”
신부님은 바깥벽을 무지개 색깔로 해보자는 엄청난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이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시잖아요”
“그러지 말고 여기서 사는 건 어때요? 마을 사람들이 요즘 나를 보면 내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한국인들이 잘 지내는지부터 먼저 물어봐요. 그들이 성당의 한국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준과 리의 따듯한 미소는 어디서든 통했다. 마을 사람들은 네 명의 한국인들에게 늘 따듯한 한부를 물어왔다. 가끔 시장에 나가면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느라 가까운 슈퍼에 가는 길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준과 리가 먼저 떠나게 되었다. 일주일은 쏜살같았다. 관광지에서 몇 일자리 투어를 함께 하는 것과는 다른 유대감이다.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식구로 시간을 공유한 것이다. 섭섭하기도 했지만 이 부부의 모습을 보니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일주일 만에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이들은 몇 달 전 미리 사놓은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일정을 변경할 수 있는지 부랴부랴 알아봤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을 억지로라도 더 잡고 싶어 할 만큼 음팡가노 사람들에게 푹 빠져있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신부님은 고마워했다. 준과 리가 짐을 싸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우리들의 헤어짐이 걱정이 된다. 큰 배낭을 메고 성당을 나서는 둘을 배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것을 발견한 동네 꼬마 아이들이 하나 둘 따라나선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다신 보기 힘들다는 걸 아는지 손을 꼭 잡고 선착장까지 뒤를 따른다. 준은 한 아이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워줬다. 이렇게라도 마지막의 서운함을 달래는 듯 보였다. 우린 마침 모자란 페인트도 살 겸 함께 뭍으로 가기로 했다. 준과 리에게 여정 동안 먹을 쵸코과자 몇 개를 사 주려 슈퍼에 들어갔는데, 둘은 이미 성당 식구들이 먹을 차와 코코아, 잼을 한가득 사 나와 나의 손에 쥐어줬다. 마지막까지도 받기만 하는 선물에 눈물이 핑 돌았다. 준과 리는 다음 여정을 위해 버스를 타고 나이로비로 떠났다.
이제 이곳의 봉사자는 무라트와 우리 셋이었다. 그는 고집이 매우 센 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유니스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딱히 무라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계란은 신선 식품이니 냉장고에 넣어하고, 아이들에게 깨끗한 생수를 먹여야 한다거나, 포리지를 만들 때 더 좋은 재료들을 써야 한다 등등이다. 다 너무 맞는 말인데 현실에는 어려움이 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습관을 바꾸라 하는 것은 선을 넘는 일이기도 하다. 유니스는 무라트의 잔소리에 화가 나 어쩔 줄을 모른다. “무라트는 경찰 같아.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트집을 잡는다고.”
무라트가 자리를 비울라치면 나에게 달려와 무라트의 ‘만행’을 일러주기에 정신이 없다. 또 그 모습을 본 무라트는 유니스가 자기에 대해 뭐라 말하는지 솔직하게 말해 달라 한다. 평화롭던 성당은 둘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넘친다. 우리는 유니스를 달래고, 무라트에게는 대충 둘러대야 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난 갈등을 싫어한다. 갈등 속에서 협의 점을 찾고 발전이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특히나 이런 엉뚱한 싸움에 말려드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다.
우리 역시 떠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무라트에게 포리지 업무를 인수인계를 했다. 무라트가 이 마을에 가지고 있는 애정은 우리 못지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이곳 사람들은 참 이상해요, 요구하는 건 많은데 정작 본인들은 바꾸질 않으니.. 우린 이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 게 맞아요”
“그 말은 우리도 동의해요. 그런데 당신이 요구하는 것을 맞추기에는 여기 사정이 좋지 않잖아요?”
“포리지만 해도 그래요. 여기에 바나나 같은 과일을 넣고 더 영양 좋은 죽으로 만들 수 있는데 누구 하나 관심 가지지 않아요. 심지어 아이들은 더러운 강물을 마신다고요.”
“돈이 문제죠, 돈이 있으면 과일도 사고 생수도 살 수 있는데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해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어요”
“엘리는 벌써 포기했군요”
무라트와 얘기하다 보니 나는 포기자가 되어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가 이곳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달 반을 지내면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너무 수동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봉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들이 원하는 것만 해주면 되는 것이 봉사일까? 아니면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고 이들 삶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참된 봉사일까? 워크 어웨이로 숙박을 해결하고 돈을 아끼면서 현지 문화도 체험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정작 내가 하는 이곳에서 하는 ‘봉사’가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