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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22. 2022

한여름의 크리스마스_EP4

음팡가노 프로젝트

해가 쨍쨍한 크리스마스였다. 아이들은 여느 날처럼 마당에서 뛰어놀았고 중학생들과 수녀님만 성당을 장식하고 치우느라 바빴다. 더위에 축 늘어진 개처럼 집 발코니에 나와 바람을 쐬었다. 이렇게 더운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 추운 겨울이 그리울 정도였다. 한참을 뛰어놀던 아이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열을 식히기 위해 우리가 있는 발코니로 찾아왔다. 

“우리 수영 가요!”

“어디로? 아. 여기 섬이었지. 좋은 생각이다! 조금만 기다려”

성당이라는 공간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더워도 짧은 나시는 입지 않았다. 오늘은 수영을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간소하게 옷을 입었다. 빅토리아 호수에서 수영을 놓칠 순 없다. 성당에서 분명 10명으로 출발했는데 지나는 길에서 만난 동네 아이들이 점점 합세한다. 내 손은 두 갠데 서로 잡겠다고 난리를 부리는 아이들 덕분에 걷기가 어려웠다. 아이들끼리는 규칙을 만들었는지 몇 분씩 내 손을 돌아가며 잡고 있었다. 아래를 볼 때마다 다른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남편은 잘 오고 있는 있는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니 우악스러운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이 남편의 팔과 등에 매달려 찰흙에 찰흙을 얹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만 잡으면 되는 내 사정이 나아 보였다. 역시 여자아이들이 좋다.

큰길을 건너 잡초 무성한 오솔길을 지나 망고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한 남자아이가

“왼쪽은 여자들 쪽이고 오른쪽은 남자들 쪽이에요, 일단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라며 모두를 세웠다.

먼저 씻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봐야 한다 했다. 이곳은 이 동네의 목욕탕이자 빨래터, 설거지 장소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일렁이는 사람이 보였다. 아낙들은 옷을 다 벗고 아기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발견한 여자들은 대충 빨래를 마무리를 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볼일이 끝났다며 해변을 양보했다. 발가벗은 채 엄마 등에 업혀있는 두 살쯤 난 남자아이가 귀여워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아이는 나와 남편을 번갈아 보더니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경기하듯 우는 아이소리에 당황해 엄마에게 사과를 한다. 모두들 웃겨 죽겠다는 듯 큰소리로 깔깔댔다. 

“우리 아이는 무숭구를 무서워해요. 무숭구가 자기를 잡아먹는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무숭구. 백인을 뜻하는 키스와힐리 단어지만 피부색이 조금 밝은 외국인을 모두 ‘무숭구’라 불렸다. 몇몇 아이에게 무숭구는 공포의 대상이다. 마을에도 우리가 지나가거나 눈만 마주쳐도 우는 아이가 있었다. 아기 눈에는 우리의 낯선 외모가 악마나 무서운 존재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아기가 더 크게 울수록 주변 사람들은 더 크게 웃었다. 

아낙들이 빨래를 챙기고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해변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은 옷을 벗으며 입수할 준비를 한다. 그 와중에도 남자 여자 따로 놀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다 같이 놀면 되지” 

라고 얘기를 해도 영 반응이 없다 나는 옷을 다 입은 채로 차가운 물에 풍덩 들어가 본다. 더위에 지쳐있던 나는 빅토리아 호수로 바캉스를 온 기분이 들었다. 깊지 않은 곳에서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나를 보더니 빨리 놀고 싶은 아이들은 마지못해 남녀가 섞여 놀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아이들은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여자 아이들은 가슴이 봉긋하게 나오기 시작했는데 윗옷을 다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는 누가 볼 새라 물로 뛰어든다. 아주 어린 남자아이들은 팬티까지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물에 뛰어든다. 

‘아.. 이래서 따로 놀자고 했구나..’ 우물쭈물하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여자들의 빨래터

배려하지 못한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찰나 아이들은 남편과 내 목에 매달려 우리가 호수 바닥까지 가라앉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수영을 할 줄 알긴 해도 바닥에 뭐가 있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호수에서 아이들은 업고 수영한 적은 없다. 아이들은 호수 아래로 잠겨 손을 휘젓는 나를 보는 것이 세상 제일 큰 행복인 것처럼 웃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수달도 보였다. 아이들은 물개라고 했는데 흔히 보는 물개보다 무숭구 두 명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난 수달이랑 처음 수영해 보는데…’

 아이들을 피해 해변으로부터 멀리 물살을 가로질러 헤엄쳐 나갔다. 물 위에 둥둥 떠 해변 쪽을 바라보니 오른쪽 편으로 마을 여자들이 한가득 모여 목욕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갱의 타이티의 여자들 그림이 겹쳐졌다. 형형색색의 보자기를 몸에 둘렀지만 제일 반짝이는 것은 그들의 피부의 색이었다. 모두 12월의 더위를 빅토리아 호수에서 해소하고 있었다.


이제 저녁 미사에 참석해야 했다. 크리스마스는 이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큰 성당이 꽉 차고 바닥부터 입구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저녁의 약간 쌀쌀함에도 겨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패딩부터 담요까지 몸에 두르고 성당을 찾아왔다. 우리가 느끼기엔 반팔을 입고도 선선한 날씨 정도였지만 매일을 한여름의 날씨로 사는 이들에게는 한겨울의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신부님과 사제들, 리키 크리스토프 모두 새하얀 옷으로 단장을 하고 성당 중앙 복도를 따라 입장했다. 키보드와 드럼 소리에 맞춰 성수를 사람들에게 흩뿌렸다. 사람들은 들썩이며 춤을 췄고 목 떨림으로 내는 비명을 연달아 질렀다. 새나 원숭이 소리 같기도 한 이 목 떨림 소리는 사람들과 기쁨이나 슬픔을 나눌 때 내는 소리라고 했다. 슬플 때의 목 떨림은 조금 다른 소리라 했는데 우리가 듣기에는 아주 비슷했다. 이곳 사람들만 느끼는 정서의 소리일 것이다. 신부님 행렬 뒤로 소녀들이 나와 춤을 췄고 청년 성가대는 화음을 넣어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일요일에 봤던 미사보다 더 큰 규모의 사람들이 모이니 성당은 앉을 곳이 없어 서있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인파들의 노랫소리로 성당이 터질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감정은 점점 고조되었고 신부님의 목소리도 격양되었다. 미사는 저녁 7시부터 시작되었는데, 10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곧 끝나겠지 예상했던 미사는 다음날로 넘어간 00시가 되도록 계속되었다. 지친 아이들은 얇은 천을 깔고 제단 근처에 누워 잠이 들었다. 어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노래를 부르고 예수님을 찬양했다. 물론 날이 날이니만큼 성당에서는 큰 행사다. 무려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니. 그런데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공동체를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였다.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은 채 밤샘 미사는 계속되었다. 우린 방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케빈에게 물어보니 미사는 새벽 4시에 끝이 났다고 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 할 광적인 열정이었다.

지쳐 잠든 아이들이 바닥에 누워있다

음 팡가 노 프로젝트


탄자니아의 워크 어웨이에는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취소했다. 너무 짧은 시간으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월 말까지 이곳에 지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여유도 생겼으니 어떤 것부터 먼저 할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여행자에게 40일은 정말 긴 시간이다. 서 유럽을 한 바퀴 돌 거나 산티아고를 걸을 수 도 있는 긴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늘 호스트가 원하는 일만 해봤지 호스트를 위해 뭘 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1. 아이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보는 것

문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들이겠지만 우린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찢어진 옷을 볼 때 왜 꿰매 입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찢어진 부분을 조금만 손 봐서 입어도 그 옷을 더 오래 입을 수 있다. 찢어진 채로 두면 점점 찢어져 결국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바느질을 가르쳐 보는 것에 대해 폴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우리 배낭에는 실이 한가득 있었다. 팔찌를 만들 재료들이었는데 좋은 인연들이라고 생각이 될 때마다 실을 엮어 선물했다. 이 재료들은 온 마을 사람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럼 바늘만 사면 되니 큰돈이 들지 않는다. 방과 후나 주말에 아이들을 가르칠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폴에게서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바느질요? 누가 그런 걸 배우고 싶어 하겠어요? 

“얼마나 유용한데요, 지금 폴 옷도 찢어졌잖아요, 이것도 꿰맬 수 있어요!”

“부모님들이 싫어할 거예요, 아이들도 마찬가질 걸요?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화이트 칼라가 되기 위해서예요. 바느질을 하고 싶어서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바느질은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바느질이 얼마나 유용한 기술인지에 대해 설득해보고 싶었지만 폴은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가 제일 유용하게 써먹는 기술이 바느질이었데.. 찢어지고 해진 옷들도 싫을 꿰 바늘로 몇 번만 왔다 갔다 하면 새것처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낮은 임금과 패스트패션산업 때문에 폴은 우리 의견에 반대했다.


2. 한국에서 옷과 학용품, 필요한 물건을 모아볼까

어느 집에나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펜, 학용품, 신발, 옷들을 꽉꽉 채워놓고 산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만 부탁해도 이곳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배송비였다. 한국에서 케냐까지 50킬로만 돼도 배송비는 몇십만 원이 될 텐데 그 돈이면 여기서 그 보다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다.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3. 의약품 구매

우리 가방 안에는 아이들과 놀아 줄 수 있는 물건들이 많다. 빨랫줄로는 줄넘기를 할 수 있고 종이와 펜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중 파우치 안에 든 매니큐어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다. 이 물건 하나면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정숙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색깔은 노랑, 핑크 두 가지뿐이었지만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작은 손을 붙잡고 매니큐어를 발라주다 보니 모르고 지나쳤던 아이들의 손이 자세히 보인다. 찢어지고 베인 살에는 밴드는커녕 소독도 한번 해본 적이 없어 보였다. 심하게 곪아버린 상처에도 모래를 슥슥 뿌려 말린 것이 다였다. 그렇게 둔 상처들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흉터 없는 다리와 손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다행히도 우리는 여행을 다니는 내내 설사 외에는 거의 아픈 적이 없었다. 설사나 모기약 마저 도그 지역의 약이 제일 잘 들었다. 그 덕에 한국에서 가져온 바르는 의약품들이 넉넉했는데 이것으로 기본적인 치료만 해주기로 했다.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는 것으로도 아이들은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약을 바르자마자 이제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2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약을 발라주고 나니 많다고 생각했던 약도 바닥이 났다. 섬에는 약을 살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 이런저런 고민을 남편과 상의하던 와중 한 남자아이가 오후 늦게 우리를 찾아왔다. 

성당 신도의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이 낯선 꼬마였다. 

“약을 발라준다고 해서 왔어요,”

“응, 어디가 아픈데?”

“여기….”

라고 말을 하며 본인의 음경을 가르친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아이를 집안으로 데려가 바지를 내려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고환이 찢어져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큰 상처에 후시딘을 발라도 되는 것인지.. 치료를 받겠다고 온 아이를 실망시킬 수 없어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줬다. 따가웠을 텐데도 어린 녀석이 울지도 않는다. 

“내일 또 바르러 와.”

나는 의사 선생님이 된 것 마냥 말을 했다. 아이는 항생제 두 알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후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내가 돌팔이인 것을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그 후로 아프지 않고 잘 나은 것일까? 성당에는 더 많은 의약품이 절실해 보였다.    


4. 결론은 모금

현금만큼 좋은 것은 없다. 현금이 있으면 옥수수가루도 살 수 있고 의약품도, 학용품도 다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모금이라는 것이 어디 쉽나. 그런데 가족들과 친구들만 도와줘도,, 50만 원은 모이지 않을까 단순한 계산을 해본다. 일단 우리의 20만 원부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이곳의 사정과 모금한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적기 위해 신부님과 상의했다. 예상치도 못한 모금을 한다는 소식에 신부님은 기뻐했지만 우리는 그에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일러뒀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삼일 동안 매일 밤마다 신부님과 이곳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정리했다. 신부님은 몰타나 정부에서 후원한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영수증들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옥수수와 설탕, 인건비 등등 상세내역이 있었고, 매달 아이들의 포리지 비용으로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모금이 될지 모르니 사야 하는 물건의 우선순위와 비율을 정했다. 먼저 곡물을 한 달 치 정도 충분히 살 것, 간단한 비상 의약품, 그리고 돈이 남는다면 학용품을 사는 것으로 정했다.


팔로워가 얼마 없는 우리의 여행 계정이었지만 이곳의 사연에 돈이 조금씩 모였다. 랜선으로만 알고 지내던 부부 여행자들 우리 가족들, 친구들도 이런 소식을 기다렸다는 듯 연락이 왔다. 섬에서 인터넷이 그나마 잘 터지는 언덕에 앉아 계좌 속 돈을 확인할 때마다 믿기지가 않았다. 50만 원만 모여도 한 달 치 곡물은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금 몇일만에 50만 원이 훌쩍 넘어 일주일 만에 150만 원 정도가 모인 것이다. 우리가 목표한 금액의 세배가 모일 줄이야. 사람들이 베푼 호의들은 이곳에서 기적이었다. 우린 신부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일주일간 모금을 하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최종금액을 같이 확인하기로 했다. 

두근거린 마음으로 계좌 속에 찍힌 돈을 보여준다. 한국 돈으로 표시된 금액에 그는 이게 대체 얼마인지 어리둥절해했다. 케냐의 환율로 계산해 보니 1420불이었다. 신부님이 그렇게 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1420불이요??? 한국인들이 엘리와 숀에게 그 돈을 보냈다는 말이에요?”

“네 그렇다니깐요!! 이렇게 많은 돈이 모일 줄 우리도 몰랐어요.”

“이 돈이면 세 달치도 넘게 살 수 있겠어요!”

 점잖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는 흥분과 기쁨으로 가득 찼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우리가 더 행복했다. 이 돈이면 곡식과 의약품까지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눈다는 것은 가슴이 벅차고 설레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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