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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n 24. 2024

드디어 맞는 약을 찾았다.

내가 웃고 나서야 의사도 웃음을 보였다.


약을 바꾸고 일주일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의사에게 인사했다. 부작용은 모두 사라졌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주치의도 따라 웃었는데, 그 역시 내 앞에서 웃음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한참 부작용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의사는 나만큼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곤 했다. 어떤 날은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다음 환자가 바로 들어갔는데, 의사가 그 환자에게는 아주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을 었다. 그땐 의사가 내게만 퉁명스러운 건가 싶었으나, 이날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는 오해가 풀렸다. 그리고 오히려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 그는 환자의 기분에 자신의 텐션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감정을 조금도 꾸며내지 않은 상태에서 진료를 볼 수 있었, 이는 치료를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잃었던 일상을 되찾은 기쁨


약을 바꾼 뒤 증상이 나아진 게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긴 어렵다. 첫날에야 통잠을 자서 기분이 좋았지만 그 뒤로는 다시 새벽에 깨곤 했다. 다만 약을 바꾸기 전과는 달리 깼다가 금방 다시 잠들 수 있었고, 그로 인한 컨디션 차이는 상당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수면의 질이 좋아졌고, 몇 달 만에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 들었다. 직장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우울 증상이 심할 때 멍하니 앉아만 있느라 하지 못했던 업무들을 무리 없이 하나 둘 처리해 나갔다. 퇴근 후에는 연인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나눌 수 있게 됐다. 그날 있었던 일과 기분에 대해 가벼운 내용을 주고으며 정신 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잃었던 일상을 되찾았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변화를 경계하는 버릇이 나왔다. 우울증이 나아졌다기보다 부작용이 사라진 것에 따른 단순 반등 효과가 아닌가 싶었다. 그 생각을 말했는데, 의사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의사는 당장의 변화에 연연하기보다는 더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나도 너무 들뜨거나 낙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좀처럼 기뻐하지 못하는 내 성격 이런 경계심에서 비롯됐다. 어쩌면 그런 성격 때문에 우울증이 도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울증을 고치기 위해 굳어진 성격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억지로 바꾸려 하다가는 더 큰 진창을 만날 것만 같다.


어쨌든 당장은 좀 나아진 듯했고, 의사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의사도 나를 밝은 모습으로 배웅해 주었다. 약을 받을 때도 한결 몸가짐이 가벼웠다. 진료를 마치고 모처럼 카페에 가서 디카페인 커피와 평소 좋아하던 샌드위치를 시켜 먹으며 햇살을 즐겼다. 천천히라도 좋으니 이대로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는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고, 내 병은 생각보다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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