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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n 10. 2024

우울증 치료를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붙잡아 줄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한 달 넘게 겪은 약의 부작용은 계속해서 심해지는 우울증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매일 약을 삼킬 때마다 대체 왜 먹어야 하나 싶었고, 당장 약을 끊으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작용이 없어지면 우울한 증상만 남을 테니까. 좋아지려고 먹는 약인데 왜 고통을 받고 있어야 하는지, 우울증 치료에 대한 엄청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약이 무서웠다. 매일 삼키는 손톱만 한 작은 알약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놀랍고 두려웠다. 그러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약 복용을 중단하고 병원에 발길을 끊는 것뿐이었다.


혼자 살고 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사는 연인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짜증이 늘었고, 당연히 집안일이나 그 외에 생활을 위해 필수로 챙겨야 할 것들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 모든 건 연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연인에게 너무 미안했고, 이대로라면 계속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때로는 날 병원에 가게 만든 연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때 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 우울할지언정 몸까지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그런 마음속 투정과는 상관없이 연인은 고맙게도 내 짜증을 다 받아주었다. 내가 하지 못하고 있던 집안일도 도맡아 하며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심지어 본인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말이다. 지칠 대로 지쳐 병원과 약을 끊겠다고 말할 때면 강력하게 반대하며 계속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었다. 내가 보든 보지 않든,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는 영상을 계속 틀어 놓기도 했다. 무기력이 심해 영상에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들려오는 내용들만으로 조금씩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의 절망이나 고통과는 별개로, 연인의 그런 노력을 헛되게 만들 수가 없었다. 당장 내가 죽어 자아를 잃고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더라도, 뒤에 남아 고통스러워할 연인을 생각하면 차마 치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우울증 치료에는 많은 단계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단계를 꼽으라면 바로 이때, 치료 초기 부작용으로 치료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시인 것 같다. 부작용과 함께 겪는 우울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데다가, 약물 치료를 시작했으니 ‘할 만한 건 다 해 봤다’는 자기 합리화도 가능한 단계다. 그런데 여기에서 포기하면 정신과 치료에 대한 불신 때문에 다시 시작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게 붙잡을 수 있는, 혹은 나를 붙잡아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꼭 연인일 필요는 없다. 가족, 친구, 반려동물, 책, 운동, 어쩌면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가 망가지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언가라는 점이다. 설사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 흔히 사랑이라 표현하는 것들. 사랑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평소 좋아하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더 적합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날 붙잡아줄, 혹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하나쯤은 그 무엇이라도 사랑해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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