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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n 03. 2024

죽은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우울증 약의 부작용은 계속됐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버틴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버틴적이 없었고, 그저 시간에 끌려가고 있을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누군가 베란다에서 추락해 숨졌다는 것이다. 사고는 매일 아침 지나던 출근길 근처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들어보니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평소보다 조금만 더 늦게 나왔다면 직접 목격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하는 내내 사고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30대 여성이 슬픈 표정으로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있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무한히 재생되었다. 퇴근길, 사고 장소가 가까워지자 심장이 뛰었다. 두려움? 설렘? 긴장감?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고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사고 장소에는 폴리스라인이 세워져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작은 화단이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고 장소로 진입하는 방향의 것만 치워져 있었다. 저 곳을 통해 경찰과 구급대원이 드나들고 그녀의 시신도 실려 나갔겠지. 천천히 걸으며 그 장소를 계속 바라봤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퇴근길 인파가 가득했다. 당일 일어난 사고였기에 소식을 들은 몇몇 주민들도 사고 장소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띠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주변을 둘러싸고 살아 움직이는 그 많은 사람들보다 뛰어내려 죽은 그녀에게 더 친밀감이 느껴졌다. 심지어는 회사 동료나 가족들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졌다. 상상 속 그녀는 이럴 수 밖에 없었다는듯 내게 씁쓸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환영은 꽤 오랫동안 나를 따라 다녔다. 집, 회사, 출퇴근길은 물론이고 꿈에서도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슬픈 표정으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새벽 5시반쯤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 불쾌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그 사고 이후, 매일같이 잠에서 깨면 죽은 그녀를 떠올렸다. 난 상상 속에서 그녀를 친구로 만들고 있었다. 몇 달 전 새벽에 잠을 깨 산책을 나갔다가 그녀를 처음 마주쳤다. 그때부터 그녀와 친구가 되었고 우리는 매일 새벽에 만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가 처한 상황, 증상, 고통 등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그녀는 산책을 나오지 않았다. 그날 아침 그녀가 죽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이런 상상을 하다보니 언젠가부터 그것이 상상인지 현실인지 모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연인과 그 사고 얘기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날 죽은 그 사람의 성별, 나이는 알려진 바가 없었고 심지어 자살을 한 것인지 사고사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30대 여성이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내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환영을 통해 우울과 죽음에 대한 끊임 없는 생각의 늪 속에서 위로를 받으려 했던 것일까. 


모든 게 상상이었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증 치료에 악영향을 주는 것 같았기에 다행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친구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전 03화 약을 먹자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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