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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May 20. 2024

우울하지 않은데 우울증일까

내가 우울증 환자임을 받아들이기까지

키우던 개가 죽었다. 이 열 글자를 쓰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던 만큼 이 아이는 내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30여 년을 살면서 마음의 안식처를 좀처럼 찾지 못했던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녀석은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었다. 녀석과 함께라면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녀석의 죽음이 감추어져 있던 내 우울증을 드러내는 기폭제가 되었고, 그것이 극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녀석은 노견이었고, 만성신부전을 앓고 있었으며 이미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오히려 수의사의 예상보다 더 오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힘겹지만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녀석을 보내고 나서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고, 최대한 내 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 줬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위안을 얻었다. 그리움과 상실감에 종종 눈물을 흘리기는 했어도 금방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보통 반려동물의 사망에 의한 우울감이 2개월 이상 지속되면 펫로스 증후군을 의심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보통 사람들은 2개월 정도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난 일주일 정도만에 괜찮아졌다. 더 애도하고 슬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했다. 하나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마음의 준비를 오래 해왔던 만큼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사소한 것에 짜증이 났고 불만이 생겼다


난 주변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근 몇 년은 녀석을 보살피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아 왔기 때문에, 주변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떠나고 내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니 가족, 연인, 직장, 집, 친구, 동료 등 주변 사람과 환경 관리는 물론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나 취미생활, 건강도 챙기며 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사소한 것에 짜증이 났고 불만이 생겼다. 다툼이 잦아졌고 집안일에 손이 가지 않아 삶의 공간은 지저분해졌다. 잘 지내던 동료와 멀어졌고 직장에서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나마 평소 좋아하던 게임에 빠져 지낼 수는 있었는데, 틈만 나면 게임을 했고, 그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것을 보면 정상적인 취미활동은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조차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주변 모든 것들이 나를 짜증 나게 하고 있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사는 연인이 내게 우울증인 것 같다며 정신과 치료를 권했다. 연인이 내게 정신과를 권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시종일관 냉소적인 내 성격이 우울증 탓이거나, 우울증으로 심화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난 어려서부터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굳어진 성격일 뿐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보다 우울감을 느끼는 일이 많았지만 이 역시 성격일 뿐 큰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최근 좀 예민해졌다고 해서 무작정 우울증 환자 취급을 하는 것 같아 저항감이 생길 뿐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우울하지 않았다. 배려 없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에 화가 날 뿐이었다. 무엇이든 되는 일이 없어 짜증이 날 뿐이었다.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예민해지지 않을까.


어느 주말,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나는 회사에서부터 주말에 할 일들을 죽 생각하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다리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동안 미뤄왔던 피아노 연습도 하겠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다리던 금요일 밤이 왔건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사이에 딱히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연인과도, 가족과도 그 어떤 갈등도 없었다. 그저 피곤해서 그러겠거니 하고는 금요일 밤이 주는 설렘이 무색하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하니 토요일부터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가 뜨기 전에 잠에서 깼다. 재미있게 했던 게임, 보고 싶었던 영화, 평온함을 주던 피아노, 향긋한 커피, 맛있는 음식 그 무엇도 나를 침대에서 이끌어 낼 수 없었다. 가능한 모든 것을 떠올려 보았지만 실패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연인이 차려준 식사를 하기 위해 겨우 일어나 배를 조금 채운 뒤 다시 침대로 끌려가 눕고 말았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누워만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저기로 뛰어내리면 편안해지지 않을까


연인이 나를 걱정하며 거실로 불렀다. 누워 있더라도 소파에서 창 밖도 보고 틀어놓은 티브이라도 보라고 했다. 난 겨우 침대에서 기어 나와 소파에 누웠다. 티브이에서 뭘 하고 있는지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봤다. 아, 저기로 뛰어내리면 모든 게 끝날 텐데. 그럼 편안해지지 않을까. 그 어느 것도 내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데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사랑하는 아픈 강아지를 돌보는 게 내 가장 큰 사명이었고, 그게 끝났으니 이제 나도 더 살 필요가 없다. 그러니 저기로 뛰어내리면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내가 펫로스 증후군에 빠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떠난 강아지를 생각하면 슬프고 그립기는 했지만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녀석은 떠날 때가 되어 떠났고, 조금은 아쉽고 후회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서 녀석을 돌봤다. 하루종일 녀석 생각에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삶의 의미를 잃었을 뿐이었다. 아니, 내게 삶의 의미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세상 모든 것에 비관적인 태도로 살아왔다. 언제나 삶은 살만하지 못한 것, 태어났으니 죽지 못해 사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밝은 미래나 희망을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 모든 생각들을 강아지의 존재가 덮어 주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녀석이 떠나자, 삶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다. 


오랜 세월 쌓아 온 이 진창은 깊기도 깊었고, 강아지를 붙잡고 버티고 있던 나는 녀석이 떠나자 발도 닿지 않는 바닥으로 점점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주변엔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었다. 아니, 있더라도 난 오래전부터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목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고 있어 볼 수 없었던 연인이 진창 바깥에서 손을 내밀며 외치고 있었다.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연인에게 병원 이름과 위치, 전화번호까지 전해받고 나서야 없는 기운을 겨우 짜내어 힘겹게 진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난 그때까지도 ‘난 우울하지 않은데 우울증일까?’라고 생각했다. 그저 슬프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을 뿐이다. 이런저런 검사를 마치고 의사로부터 '중증도의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들은 뒤, 처방약 일주일분을 받아 들고 나서야 내가 우울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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