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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May 16. 2024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니다

밝히기 꺼려지는 만큼 우울증은 무겁고 어렵다

당신이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자. 어느 날 회사에서 당신의 정신건강에 명백히 해가 될만한 업무를 맡기려고 한다. 이때 당신은 회사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감기와 비교하기엔 우울증은 너무도 무겁고 어렵다


나는 30대 후반의 중견 직장인이자 한창 치료 중인 우울증 환자다. 그런데 최근 신변상의 이유로 회사에 우울증 병력을 밝혀야 할 일이 있었다. 편한 분위기의 회사인 데다 나름 연차도 쌓여 어지간한 이야기는 별 눈치 보지 않고 꺼낼 수 있는 상황임에도 우울증을 밝히기는 쉽지 않았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미뤘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데, 왜 그렇게 꺼려졌을까. 


최근 정신병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나와 인기를 끄는가 하면, 연예인들이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잇따라 고백하기도 한다. 다양한 정신과 전문의 유튜브 채널들은 흥미로운 주제들로 우울증을 다루며 우울증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나가려 한다. 


과거에 비해 우울증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비유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울증을 직접 겪으면서, 나는 이 ‘마음의 감기’라는 말에 반기를 들게 됐다. 누구나 쉽게 걸릴 수 있고,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의미라면 동의하지만, 한편으로 우울증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겨지게 하는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21년 조사에서 우리나라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OECD 1위를 차지했다. 국민 10명 중 4명가량이 우울증을 앓는다. 그러나 주변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의 병력을 숨긴다. 감기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벌써 감기와 우울증은 그 무게가 다르다.


증상과 치료를 생각하면 그 차이는 더 확연하게 다가온다. 우울증의 증상은 삶의 모든 것이 점차 망가져 가는 것이고, 그 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우울증의 치사율은 10~15%에 이른다. 치료도 더없이 힘들다. 외과적으로 원인을 제거할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낫는 것도 아니다. 치료를 시작해도 문제다. 우울증 치료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내게 맞는 약물을 찾고, 그것이 효과를 보일 때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수백, 수천 번의 갈등을 이겨내야 비로소 치유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의 생존에 우울증은 치명적이다


미디어를 통한 인식 개선이 우울증 환자들의 병원 방문을 이끌어 내는 데에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겠으나, 그렇다고 우울증이 쉽게 밝힐 수 있는, 혹은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병이 아님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을 사실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감정을 공유하고 관계를 이어 나가며 정보를 교환하거나 협력함으로써 경쟁과 생존에 이용한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와는 정서적 교감이 어렵다. 연민과 이타적 감정으로 우울증 환자를 이해하고 돌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존재로 여기기는 힘들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울증은 다른 질병들에 비해 유독 숨기고 싶은 병이다. 연봉 협상을 앞두고 있는 운동선수가 부상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시종일관 타인에 대한 평가가 끊이지 않는 사회생활 속에서 우울증은 치명적인 약점일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진료를 받으며 회사에 우울증 병력을 밝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주치의는 누군가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지, 누구에게 이야기를 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자세히 물었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우울증 병력을 밝히는 행위 자체가 증상을 더 심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팀장에게 우울증을 앓고 있음을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밝혔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팀장이 먼저 꼭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아무리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나 밝히기 어렵고 꺼려지는 것은 정신질환 고유의 성질이다. 사회생활이라는 굴레에 매여 있는 직장인에게는 특히나 더 어려운 병이다. 누군가에게 우울증 병력을 애써 밝히는 것은 상처가 났음을 보여주기 위해 상처 부위를 더 벌리는 것과 비슷하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감기와 비슷하다. 다만 '버티면 일주일, 병원 가면 7일'이라는 감기처럼 절로 낫는 병은 아니다. 마음의 감기라는 말을 오해해 치료도 감기처럼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치료 과정은 더없이 힘들고 어렵다. 장담하건대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를 방문한 환자 중, 꾸준히 치료를 받아서 좋아지는 사람보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의사의 진단 없이 스스로 그만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울증은 치료를 향한 환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울증 치료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언젠가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앞으로 우울증 투병기를 써 나가볼까 한다. 이 우울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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