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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n 17. 2024

항우울제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았다.

더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의 강요에 못 이겨 다시 병원을 찾기는 했지만 이제 이런 진료도 몇 번 남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날이 마지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의사에게 부작용은 더 심해졌고 우울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을 그 어느 때보다 지친 표정과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의사 역시 나를 따라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증상이나 생각을 말하도록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보다 적합한 약을 찾으려는 듯했다.


이번에도 약을 바꾸었다. 약을 바꾸는 일이 반복될수록 기대나 희망은 점차 먼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라면 모를까. 약물을 바꿔가며 반응을 살피다 보니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점점 더 몸이 망가지 정신이 피폐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순순히 약을 바꾸고 성실하게 복용하기로 한 건, 연인의 도움 덕분이기도 했지만 더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내 몸과 정신에 대해 거의 자포자기인 심정이었다.


지나고 나서 하는 말이지만 부작용을 견디며 내게 맞는 약을 찾는 이 힘겨운 시간들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었다. 다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모든 걸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과학을 전공하고 평소 꽤나 냉철하게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성향인 내게도 쉽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정신과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백번 이해할 수 있다.


부작용이 사라지고 조금의 희망이 생겼다.


의사는 이번 약이 행복감이나 안정감을 주기보다는 무기력증을 이겨내는 데 더 좋다고 했다. 그리고 밤에 먹는 약도 따로 처방을 받았다. 새벽마다 깨서 잠들기 힘들어하는 점을 고려해 숙면을 도울 수 있는 약을 처방한 것이었다. 다만 의사는 내가 먹는 약이 어떤 성분인지, 어떤 이름인지는 잘 알려주지 않았다. 노시보 효과를 고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시보 효과는 플라세보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약효에 대한 의심이나 부작용에 대한 걱정이 실제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의사의 의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내가 먹는 약이 무엇인지 알아야겠기에 약학정보원에 들어가 검색했다. 약의 모양과 색깔, 제형 등을 선택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번 약은 기존에 먹어왔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억제제(SSRI)가 아닌, 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NDRI)였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인지기능, 주의력 강화, 장기기억 강화 등의 작용을 하고, 도파민은 의욕, 행복, 기억, 인지, 운동 조절 등에 관여한다. 내 우울증 증상은 우울감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충동적인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며 과수면과 무기력, 좌절감이 드는 게 주요 증상이었다. 이번에 받은 약은 이런 증상에 효과적이며, 각성 효과도 있다고 하니 기대감이 들었다. 자기 전 복용으로 받은 약은 사환계 항우울제로, 졸음을 유발하고 식용 증가 작용이 있다. 두 약의 설명 상으로는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항우울제 두 가지를 함께 복용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조금의 희망이 생겼다.


그날 밤 자기 전 약을 먹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핑 도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누워서 바로 잠에 들었고,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잤다. 정말 오랜만에 통잠을 잤더니 그것 만으로 행복감이 들었다. 개운하고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다만 약기운이 남아 멍하고 어지러웠다. 오히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평안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곤 출근 전에 NDRI를 복용했다. 자기 전 약의 효과가 강렬했기 때문인지 각성효과는 딱히 느껴지지는 않았고, 비몽사몽 한 상태로 출근길에 나섰다.


그날의 기분은 잠을 잘 잤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의 모든 부작용들이 사라지며 편안해졌다. 속 쓰림과 메스꺼움, 구역감, 가슴떨림, 예민함 등 깨어있는 동안 계속 고통을 주던 부작용들에서 해방되자 그것만으로 만족감이 들었다. 이제 약효만 제대로 나타나면 되겠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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