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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l 01. 2024

한 아이가 비관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까지

내게 맞는 약을 찾아 정신을 좀 차리고 깊은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왜 우울한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강아지의 죽음 때문이라 여겼다. 강아지가 떠나고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애초에 왜 삶의 모든 의미를 강아지에게만 두게 되었는지를 돌아봐야 했다.


나는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 여긴 적이 있었다.


나는 평소 '무엇이 하고 싶니?' 또는 '무엇이 갖고 싶니?'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내가 이미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며 행복한 사람이라는 근거라 해석하기도 했다. 나도 한때는 그런 줄로 알았고, 스스로 현재에 만족하는 행복한 인간이라 여겼다. 하지만 반대였다. 나는 원하는 것이 없고, 무언가를 원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어떤 것이 나에게 만족감을 주고 평온함을 주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거워하지 못했다. 연인은 말했다. 내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겼어도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나 역시 기억을 되짚어 봤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살면서 소소한 즐거움도, 큰 기쁨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이후 일어날 수 있는 안 좋은 일을 경계했다. 그래서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오르막 이후에는 내리막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이러한 태도가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나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생각하며 살아온 셈이다. 그러니 기쁜 일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특별히 바라는 것 없이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항상 우울했다. 그것이 우울증 수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본적으로 우울감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기본 태도가 이러하다 보니 난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가끔 의미를 두는 것이 생겨도 으레 실망이나 좌절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의지를 잃어 갔다. 그러다가 강아지를 만났다. 녀석은 나를 실망시키거나 좌절시키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나에게 편안함과 기쁨만을 주었다. 녀석이 잘 먹고 잘 자는 모습만 봐도 기쁨이 넘쳤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녀석의 존재에 내 삶의 의미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떠나자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고, 순식간에 덮쳐 온 허무함이 내 마음 바닥에 깔려 있던 우울감을 더욱 깊은 구덩이로 몰아넣어 우울증이라는 병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아이가 비관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까지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어려서부터 기저에 우울감을 깔고 살아가는 인간이었던가? 기억이 시작되는 희미한 시절부터 나는 항상 우울한 아이였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향적이며 눈치를 잘 보고, 표현을 잘하지 않으며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약한 수준의 자해를 한 적도 있다. 모든 것들은 결국 부모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부모님이 내게 미친 부정적인 요소들은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지 않았던 것은 심한 부부싸움이었던 것 같다. 부부싸움이 매우 잦았고, 그중에는 물건이 깨지거나 폭언이 오가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어린 내게 그런 상황은 너무도 공포스러웠고 나는 자연스레 갈등을 피하는 인간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내게 인간관계는 갈등의 시작점이었기에,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갈등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라면 맞서지 않고 외면했다. 그러니 자아형성에 적극적이지 못했고 수동적이며 소심하고 내향적인 아이가 되었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고집을 부리기는커녕 표현조차 하지 않으니 항상 욕구불만 상태였다. 겉보기로는 인내심이 강하고 일찍 철이 든 착한 아이처럼 보였겠으나 그건 모두 갈등을 피하기 위한 처세에 불과했고 내면은 계속해서 침잠해 갈 뿐이었다.


욕구불만들은 점차 체념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체념은 패배의식과 허무주의를 키워냈다. 난 그렇게 사춘기를 거치며 비관적인 인간이 되었고, 심사가 꼬인 상태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런 태도는 의외의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했다. 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깨어있는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실제로 성인이 되고 사회화를 거치면서, 부정적인 태도는 숨긴 채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다 보니 냉철하고 분석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태도를 숨기면 숨길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러다 강아지가 떠난 뒤 의지할 곳 없이 부정적인 자아를 감추려 발버둥 치다 보니 결국 모든 에너지가 다 떨어졌고, 죽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여기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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