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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l 15. 2024

정신과에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나만을 위한 시간이 시작되는 말, "지난 주는 어떠셨나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의사 앞에서 어떤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처음 방문 시 질문은 ‘어떻게 오셨어요?’ 였고, 그 뒤로는 항상 ‘지난 주는 어떠셨나요?’로 진료가 시작됐다. 첫 진료 때야 방문 전부터 증상들을 나름 정리해 갔기 때문에 막힘 없이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두번째 진료부터가 난감했다. 일주일간 그 셀 수 없는 감정 기복의 폭풍을 거쳐 병원에 갔는데, 어땠냐는 질문에 ‘괜찮았어요’ 또는 ‘별로였어요’ 둘 중 하나로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병원 방문 전에는 지난 주 기분이 전체적으로 어땠는지 죽 돌이켜 보고 정리하면서 당시의 감정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 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내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감정이 가라앉든 격해지든 행복했든, 당시에는 그 감정에 취해 객관적인 분석이 어렵다. 어떤 것 때문에 화가 났는지, 어떤 상황에서 우울해졌는지, 누구를 만났을 때 기분이 좋고 나빴는지, 이런 기분 변화의 기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 있어야 했다. 충분히 시간이 지난 뒤, 제3자의 시작에서 객관적으로 당시의 상황과 그때의 감정을 들여다 보는 것은 놀라운 결과를 도출해 냈다. 당시에는 전혀 풀리지 않던 감정의 문제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의사는 내가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가이드 역할을 한다. 그의 '어떠셨어요?'라는 질문이 그 시작이다. 내 감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하는 이 시간은 살면서 몇 안 되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을 마련되는 것만으로 이미 정신과 마음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처음엔 내 감정과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나 언젠가부터는 입을 떼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의사는 시종일관 신중한 표정으로 듣고 부지런히 차팅을 한다. 그리곤 질문들을 던지며 내 이야기가 끊기지 않도록 한다. 스스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낼 때까지 의사의 가이드는 이어진다. 대체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처한 상황이 현재 어떠한지, 그 밖에 약 부작용에 관련된 질문 등이다. 나는 그 질문들에 하나둘 답하면서 뒤죽박죽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내 정신줄을 풀어내는 것이다. 


좋은 의사를 만나 다음 진료가 기다려진다


이야기가 상세해질수록 의사의 가이드도 구체화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감정 대처를 하는 게 좋은지 조언을 받기도 한다. 가끔은 그 조언이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라 놀랍고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회사에서 심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업무가 있었는데, 의사는 그것이 부모와의 부정적인 관계성 때문이라 추측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데다 정확히 들어맞는 진단이어서 놀랐던 일이 있다. 심지어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진료 초창기에 했었기 때문에, 오래 전의 기록까지 고려해 가면 진료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사에 대한 신뢰가 한층 더 깊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의사가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 조언을 하는 건 아니다. 그중엔 내가 이미 알고 있었거나 짐작했던 내용들인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에도 의사의 조언은 내 생각이 그저 짐작이었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최근에는 기분이나 감정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이 생기면 '선생님께 꼭 이야기 해야지'라며 기억해 두고는 다음 진료를 기다리기까지 한다. 당장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의사 앞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리가 되고 바람직한 대응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렇게 정신과 치료에 의사와 환자의 라포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확인했다. 이런 주치의를 한 번에 만났다는 것이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우울증 치료에서 크게 위안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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