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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l 08. 2024

재발 불안, 여전히 아프다는 증거

맞는 약을 찾고 한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언제나 불안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우울해질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실제로 무기력증을 동반한 우울감이 때때로 나타났고,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치료를 받기 전 경험했던 그 구렁에 다시 한 번 발을 들이면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일주일마다 병원에 방문해 우울했던 날이 얼마나 있었고, 어떤 때에 발생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의사는 약의 용량을 늘리거나 새로운 약을 추가했다. 


꾸준히 약을 먹으며 한 주를 평안히 보낸 뒤 맞은 어떤 주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청소를 했다. 일주일 동안 쌓인 쓰레기도 모두 버렸다. 바쁘게 움직였더니 어느새 땀에 젖었고,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내 몸도 깨끗이 씻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깨끗해진 집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소파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이제 우울증이 다 나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문득 ‘이제 뭘 하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당장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침대로 기어 들어가 다시 우울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우울한 것이 아니라 우울해질까 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감이 올라왔다. 불안은 점점 커져 안절부절못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뭘 해야 할지를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한 친구로부터 '날씨가 좋아 공원에서 책을 읽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거다 싶어 그때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추운 날씨였지만 친구처럼 밖으로 나가서 햇빛 아래 앉아 책을 읽기로 한 것이다. 


옷을 입고 따뜻한 커피를 탔다. 그렇게 싫어하는 자외선차단제를 방금 세수한 얼굴에 열심히 발랐다. 커피와 함께 먹을 달콤한 과자도 챙겼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모두 챙기는 욕심을 부리며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햇살은 좋았지만 바람이 불고 추웠다. 그래도 난 하고 싶은 일, 하기로 한 일을 해야 했다. 아파트 정원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 몇을 제외하곤 썰렁했다. 추위를 덜기 위해 커피부터 홀짝였다. 몸이 좀 따뜻해지자 책을 읽었다. 당시 읽고 있던 책이 있었지만 이 날은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었다. 한 번에 하나의 책만 읽는다는 스스로의 규칙을 깨고, 좋아하는 책에서 좋아했던 부분을 찾아 읽었다. 햇살도 경치도 커피도 책 내용도 좋았다. 잠시 행복감이 찾아왔다.


곧 커피가 다 떨어졌고, 바람이 불자 손이 시렸다. 읽고 싶었던 부분을 다 읽고 나니 흥미도 떨어졌다. 산책을 하던 개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 한겨울 햇살 속에서 떨고 있었다. 멍하니 경치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예전에 좋아하던 드라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밖에 나와 돌아다니며 몸이 풀려서 그런지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할 일이 생기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책을 덮고 집으로 향했을 때는 나온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집에 들어와 곧바로 드라마를 찾아 틀었다. 약 14년 전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지만, 1화를 켠 지 20분도 버티지 못하고 꺼버렸다. 14년 만에 다시 본 드라마는 너무도 엉성하고 촌스러웠다. 실망감이 컸지만 운동이라는 다음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땀을 흘리며 묵묵히 목표량을 모두 달성하고, 또다시 샤워를 했다. 금세 저녁 식사 시간이 됐고, 밥을 먹으며 연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추운데 밖에 나갔다 온 뒤 운동까지 해서 그런지 몸이 노곤해져 침대에 누웠다. 쏟아지는 잠에 젖어들어가며 우울증의 늪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보냈음에 안도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불안해하고 안도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병들어 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 우울증은 쉽게 낫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잠에 들 때까지 다음날은 또 무엇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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