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때가 쏙 빠지도록 이불 한번 빨아 보겠다는 건 나의 오랜 각오였다. 평소 이불을 빨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18kg 용량 세탁기에 넣어 돌리기도 하고 집 앞 세탁소에 큰돈 주고 맡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불 때가 제대로 빠졌다는 느낌이 없어 찜찜했다. 겨우 섬유에 밴 땀내와 체취가 가신 정도에 만족해야 하는 건지, 이것은 분명 한 번 짚고 넘어갈 일이었다.
이불 한번 '제대로' 빨아보자 마음먹었다. 때가 꼬장꼬장 낀 양말 한 짝만 제대로 빨려도 기분이 새로운데, 하물며 코끼리 덩치만 한 이불일까. 기대 이상으로 정신 건강에 큰 유익을 가져올지 모를 일이었다.
임무를 완수하자면 욕조를 먼저 들여야 했다. 몇 차례 간이 욕조를 들인 적이 있었지만 물때 관리의 어려움 탓에 얼마 안 가 처분하곤 했었다. 이번엔 순전히 이불 빨래를 목적으로 쓰던 욕조라도 구해오자 생각했다. 단단히 벼르던 차 우리 아파트 출입문 앞에 플라스틱 욕조가 하나 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폐기물 딱지가 붙은, 물때 낀 흔적조차 없이 말끔한 욕조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을 옮겨왔다. 그것은 맞춤 가구마냥 욕실 벽면에 꼭 맞아 들어가는, 우연치고는 너무 완벽한 욕조였다.
온수를 반쯤 채운 욕조에 하얀 광목이불 두 개를 푹 담갔다. 한동안 빨지 못해 오래도록 마음에 걸려 했던, 아이들이 덮는 여름용 이불이었다. 가루 세제를 넉넉히 풀고 작아진 세숫비누도 문질러 담갔다. 때가 충분히 불도록 반나절쯤 기다릴 참이었다. 두 발로 꾹꾹 밟아 오래 묵은 때 뺄 생각을 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대는 것이 일상의 행복이란 참 별 거 없구나 싶었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왔다. 나는 무릎까지 오는 장목 장화를 야물게 올려 신고 물놀이에 들뜬 아이처럼 욕조의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한발 또 한발, 내딛는 발에 몸의 힘을 실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어깨를 활짝 펴며 균형을 잡는 데에 신경을 썼다. 지근지근, 자근자근. 나는 느릿한 하체의 움직임과 함께 때가 빠져나오는 여실한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밟아댔을까. 허벅지가 묵직해 올 무렵 검게 변한 구정물에 통쾌함이 밀려왔다. 오래 묵은 때가 속절없이 손을 들고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숙변을 한꺼번에 몸 밖으로 내보냈을 때의 개운함. 조금 속된 표현일지 몰라도 그때의 내 심정이란 꼭 그와 같았다. 무엇이라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호기가 동시에 차올랐다.
욕조 바닥의 물 빠짐 구멍을 훅 열었다. 때구정물이 슬슬 눈치를 살피더니 꾸룩꾸룩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그래그래, 얼마든지 줄행랑을 치거라. 그렇게 말하는 두 발은 여전히 기세등등, 풀죽은 이불을 꼭꼭 밟고 있다. 이제 뒷일은 세탁기의 몫으로 남겨주자. 힘을 잃고 축 처진 이불을 세탁기에 떨어트리고 헹굼 버튼을 누른다. 얼마 안 가 세탁 종료를 알리는 경쾌한 알림음이 난다. 거짓말처럼 뽀애진 이불이 매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말갛고 순한 얼굴로 세탁기를 빠져나온다.
초여름날 어느 오후, 해가 귀한 정동향 집은 볕이 이미 비껴간 뒤다. 아무렴 어떠랴. 나는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을 향해 큰 창을 열어젖히고 가벼워진 이불을 팡팡 털어 널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불을 단정히 개키라'는 조언이 자기 계발의 기본인 양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걸로 충분할까? 매일 덮는 이불이라면 어쩌다 한번은 새하얗게 되도록 힘껏 밟아 빨아 봐야지. 새하얗고 보송한 이불이 숙면에 도움이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불 때를 빼내기 위한 몸동작 하나하나가 그늘진 내면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실상 '발로 이불 빨기'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허리를 굽힐 일도, 손목 쓸 일도 없는, 물 먹어 늘어진 이불을 세탁기 통으로 옮길 힘만 있다면 의외로 해볼만 한 일이다.
뿌듯함과 함께 행복한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펼쳐 널어 놓은 이불 곁 아무것도 안 깔린 알바닥에 그대로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햇볕 아래 빨래 마르는 꼬스름한 냄새는 없어도 묵은 때를 완전히 털어낸 광목에서는 맑고 개운한 기운이 은근하게 풍겨나온다. 큰창으로 불어오는 6월의 아직 선선한 바람을 타고 일상의 리셋을 알리는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