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막 헹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보고야 말았다. 신성한 욕실에 침투한 최대의 불청객, 타일 틈새마다 고운 빛깔로 피어난 곰팡 때의 그 뻔뻔한 낯짝을. '요놈, 잘 걸렸다!' 어김없이 나는 비장해지고 만다. 축축한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거나 말거나 털이 억센 청소솔을 집어 들고 두 눈을 부릅뜨게 되는 것이다.
진원지를 중심으로 새끼 곰팡이가 점점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다. 고놈 참 끈질기기도 하지, 틀림없이 이틀 전에 닦아냈는데. 같은 모양의 타일이 사방으로 균일하게 발려있건만 새 곰팡이가 피어난 것이 지난번과 같은 자리, 꼭 그 지점인 것은 영락없는 미스터리다. 나는 눈앞의 '참을 수 없는 불결'을 당장 제거하려들었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놈들이 몰라보게 세를 확장할 걸 생각하면 불같은 전의가 이는 것이다.
하나의 불씨를 진압하자 또 다른 불씨가 눈에 들어왔다. 간교한 곰팡군단은 시작도 끝도 없는 타일 미로를 타고내리며 치밀하게 욕실 상륙 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 벌거숭이 몸은 그렇게 한평 타일 감옥에 갇혀 고독하고도 처절한 싸움을 혼자서 싸우고, 또 싸워야만 했다. 간단히 샤워를 하겠노라 욕실에 들어갔다가 뜻하지 않게 곰팡 때의 습격을 만나 홀로 사투를 벌이게 되곤 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로 더러움의 가능을 품은 욕실벽 앞에 좌절하며 자신을 본다. 곰팡이 때는 결국 인간의 뒤태다. 지우고, 벗기고, 다시 털어내도 도로 때가 끼고 얼룩이 지는 것이 사람의 성정이다. 마음의 그늘이란 순간의 방치로 무섭게 불어나는 곰팡이 세와도 같다. 별일 아니겠지, 하고 두었다간 오래지 않아 우울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남의 사소한 잘못을 트집 잡아가며, '너보다야 내가 낫지' 으스대며 살아간다. 제 속이 얼마나 까만 줄도 모르고서. 마음을 비우고, 잘못을 뉘우치고, '나아지리라' 종종 다짐도 두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한번 생긴 곰팡이 때가 절로 사라지거나 사그라드는 법이란 없다. 누군가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땀샘이 일제히 열린다. 땀을 흘리고 또 물세례를 받아가며 그것의 흔적을 없이 하려 요동을 친다.
욕실의 말끔한 상태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욕실 청소를 게을리할 수 없는 건 어제의 부족한 나를 지우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 때문이다. 적어도 한꺼풀 때를 벗겨낸 욕실이 개운함을 유지하는 동안은 속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테지. 한동안은 '그래도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지' 하는 착각 속에서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