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그리고 따로 여행하는 법

뒤늦게 쓰는 거제 지심도의 추억 (2020년 8월)

by 서지현


저마다 여행의 즐거움을 누리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남편은 부모님을 어디 좋은 곳으로 모실까 하고 시종 지역의 랜드마크를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볼거리에 크게 개의치 않으시는 듯했다. 평소 워낙 술을 달게 드시는 분이셨다. 무엇을 안주삼아 술 한잔 할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시는 것 같았다.



우리가 머문 리조트는 취사가 허락되지 않는 '청정 숙소'로 운영되고 있었다. 라면 한 봉 끓일 수 없는 곳이라 술을 마신다 해도 마른안주 외에는 여의치 않았다. 10분이 멀다 하고 숙소 안팎을 들락날락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쩐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첫날 저녁, 우리는 저녁을 리조트 내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장거리 주행으로 다들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리조트 내 푸트코트 형태의 식당에는 한식, 중식, 일식 등 메뉴가 다채로웠다. 당연히 술은 없었다. 아버지는 주문한 국의 얼큰한 국물 몇 숟갈을 뜨시더니 곧 주머니에서 삼다수 한 병을 꺼내셨다. 그러고는 그것을 식당 컵에 따르셨다.



"할아버지, 식당에 물 있는데 왜 그걸 싸왔어요?"

"어? 이게 물맛이 더 좋아서."

아버지는 손자의 질문에 씩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시더니 삼다수를 한 컵 더 따르시는 거다.

한참이나 할아버지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는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 할아버지, 삼다수가 아니라 삼다술이었네!"

취기가 올라 벌게진 얼굴로 아버지는 '허허허' 하고 호방한 웃음을 지으셨다.





지심도의 한낮, 청량감 넘치는 탱자와 아이


둘째 날은 거제 지심도로의 여정이었다. 지심도는 섬 전역에 걸쳐 동백나무, 후박나무, 소나무, 유자나무 등 37종에 이르는 수목이 자라나는데, 그중 60-70% 동백나무라고 하여 동백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느긋하게 섬의 정취를 느끼고자 민박집 숙박을 하루 잡아둔 참이었다.



거제에서 배를 타고 가까스로 섬에 오른 우리는 우선 짐을 풀어야 했다. 마중을 나온 주인을 따라 민박집에 당도했다. 그런데 대문을 열기가 무섭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마마마, 마당에 불판 있으니까 됐네. 어여 숯 올리고 고기 꾸버라"

"네? 아버지, 불판은 저녁에 쓰기로 예약해 놓았고요, 일단 섬 둘레길부터 돌고 봐야지요."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섬은 벌써 다 봤다. 좋더라. 둘레길 볼 게 뭐 있노. 어서 고기나 꿉자."



결국 우리는 둘레길을 가볍게 산책하고 와서 바로 고기를 굽는 걸로 타협을 보았다. 발길을 떼는 내내 웃음이 터져 나와 아주 혼이 났다. 어떤 극 중 상황이나 무대 위 웃음보다 진하고 기가 막힌 웃음이었다. 아버지의 취향과 기호를 알게 되고, 가까이서 그분의 소탈함을 경험한 뒤로는 여행이 쉬워졌다. 사실 시부모님을 모신 여행이라 해서 배낭여행같이 가볍고 유쾌한, 발길 닿는 대로의 여행이 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여행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실은 그 누구도 지워준 바 없는 부피만 큰 헛 짐을 말이다. 아버지처럼 나도 나대로 여정의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는 거로구나, 비로소 깨달음이 왔다.



불판 위의 소박한 별미, 숯불구이 감자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아들 며느리에게 한 점, 손주들에게 또 한 점. 고기를 굽는 내내 아버지는 행복에 겨워이셨다. 고기를 다 굽고 나서는 아직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숯불 위에 감자를 올리셨다. 느긋한 기다림 속에서 감자는 뭉근하게 익어갔다. 고구마 맛도 나고 단호박 맛도 나던 숯불 위의 소박한 별미, 그날의 숯불구이 감자를 결코 잊지 못한다. 사그라들듯 아예 소멸되지는 않는 숯불처럼 우리들의 이야기도 가늘고 길게 이어져 갔다.



그렇게 난 시아버지를 통해 '함께, 그리고 따로 여행하는 법'을 서서히 배워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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