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얼굴이 여자의 민낯이라면 수염을 자라도록 버려둔 얼굴이 남자의 민낯이다. 남편은 휴가 때마다 수염을 기른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면서.
삐죽 돋아난 수염이 꽤나 까칠하다. 아빠가 장난 삼아 수염 난 얼굴을 가까이하면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싫은 내색을 하며 도망가 버린다. 우리 집 남자의 수염에 대해 평소 나와 아이들이 경험하여 아는 바는 거기까지였다.
휴가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그의 수염을 재미 삼아 쓸어본다. 수염이란 존재를 새로이 알아가는 기분이랄까. 거친 것에도 결이 있더라. 수염이 방향성을 가지고 자라난다는 걸 알게 됐다. 결대로 쓸면 한없이 부드럽게 쓸리는 수염이 자라나는 방향과 반대로 쓸면 고집 센 아이처럼 빳빳이 고개를 쳐든다.
수염은 자랄수록 순해져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차분해진다. 어느 정도 자란 수염을 손으로 쓸어보니 전혀 깔끄럽지 않았다. 탄력 있는 빗자루 발 같아서 생명력마저 느껴졌다.
부부가 함께 보내는 휴가란 그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배우자의 자상함과 까칠함을 동시에 마주하는 것. 꼭 수염과 같은 것. 우리는 여행 중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아무래도 많은 식구가 움직이는 여행이기도 했고 가정에서처럼 서로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았다. 서로의 역할 수행을 두고 말이 많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툭툭 불거질 때마다 서로가 감정의 날을 세우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쉬이 누그러지곤 하는 것이었다. 대개는 수염처럼 버려두면 될 문제였던 것이다. 가만 두면 제 나름대로 결과 방향성을 가지고서 자라나는 수염처럼 절로 해결될 사소한 일들.
아이들은 한결 부드러워진 아빠 수염을 쓸어보기도 하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기도 하면서 즐거워했다. 분명한 사실은 수염이 자라나는 만큼 아이들은 아빠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휴가 마지막 날, 수염을 깎을 때가 됐다며 큰 슬픔에 잠겨있는 아빠에게 아이는 아빠 얼굴 초상을 선물했다. 자유와 한가를 잠시 접어두고 사회적 책임과 긴장이 있는 의무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아이가 그려낸 초상화에는 덥수룩한 수염과 우울감에 파묻힌 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