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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Feb 24. 2021

집밥은 베이스다

멸치 대가리 버리지 마세요

시동이 바로 걸리지 않는 날이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다던가, 괜스레 몸이 찌뿌드드한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대기질이 워낙 나빠 가스불을 켜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던가, 대체로 그런 날들이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주방에 설 때면 칼에 손을 베이기 일쑤고 음식의 간이 지나치게 짜든가 싱겁든가 한다.



'대체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당장의 끼니에 대한 계획도, 요리에 대한 의지도 없는 그런 날은 그저 막막하다. 그러다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문짝 한편에 의연하게 서있는 맛국물 한 병, 별안간 눈이 번쩍 뜨인다. 잘 우려낸 육수 한 병이면 어떤 국이나 찌개라도 다 된 셈 아닌가.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친대도, 아이들이 실컷 놀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들어와도, 야밤에 무얼 먹을까 하는 남편의 철없는 고민 앞에서도 당황스럽지 않다. 통상 육수라고 말하는 맛국물, 이만한 요리 지원군이 또 있을까.




육수 내는 날, 타이밍의 스릴



어떤 지인은 다시팩이 세상에 나온 것이야말로 주방 살림의 혁명이라 말했다. 다시팩이란 멸치, 다시마, 북어, 말린 표고 등 육수의 기본이 되는 재료가 작은 사각 티백 안에 담긴 것인데, 국물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 티백을 물에 넣고 얼마간 끓이다가 건져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수고를 대폭 덜어주면서 집밥을 한결 수월케 한다.



이러한 다시팩의 뛰어난 효용에도 맛국물만큼은 직접 내는 편을 택해왔다. 우선 티백 성분이 우려스럽고 요리 때마다 티백 쓰레기를 만드는 상황에도 맘이 편치 않아서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어떤 채소라도 직접 손질해 사용하는데 손질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육수의 훌륭한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파 뿌리며 겉잎, 양파 껍질, 양배추나 배추의 심지, 무나 당근 밑동 같은 거. 실질적으로 요리에 쓰일 수 없는 채소 부위지만 영양성분은 뛰어나다.  



채수도 종종 만들지만 보통은 모아둔 채소 자투리에 멸치 다시마를 더해 국물을 우린다. 육수 내는 날, 냄비가 가스불에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뽀얗고 작은 기포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른다. 수많은 기포들은 영역을 확장하며 점차 몸집을 불린다. 한껏 부풀어 오른 기포는 거품이 된다. 거품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그것은 얼마안 가 산산조각 나면서 순식간에 터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물은 보란 듯이 거품의 파편을 끌어안고 바글바글 끓어대겠지.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에 수를 써야 한다. 골든 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며 용사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가스불 앞에 서있다. 이 타이밍의 스릴에 가슴이 뛴다.





멸치 대가리와 채소로 우린 맛국물이 꽃처럼 향기롭다
기포가 생기며 끓어오르는 찰나 멸치 대가리를 걷어야 한다


질 좋은 멸치는 맑은 은빛을 띤다. 마치 내리쬐는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빛깔 같은. 빛깔이 하얗고 쩐내가 없는 멸치는 머리 부분도 육수의 좋은 재료다. 아무리 작은 멸치라도 생선이지 않은가. 생선에서 칼슘이 가장 많이 함유된 부위는 단연 머리, 멸치 머리라고 그냥 버릴 수야 있겠는가.



멸치 머리를 육수용으로 사용할 때는 안쪽 아가미를 말끔히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멸치 머리를 뜨거워진 물에 잠깐 적시는 수준으로 다뤄야 한다. 무엇보다 거품이 생기면서 끓어오르려는 찰나 거품과 함께 멸치 머리를 걷어내야 한다. 그래야 쓴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나머지 채소는 약불에서 뭉근하게 오래도록 우린다. 멸치 머리를 넣어 우린 맛국물의 맛을 설명하자면, 좋은 소금에 살짝 간이 밴 담박한 채소의 맛. 꽃처럼 향기로운 맛. 틀림없이 기대 이상으로 깔끔한 감칠맛에 반하게 될 것이다.



조금 여유가 있는 날은 손질한 멸치 머리를 마른 팬에 볶아 수분을 날려 보낸 후 믹서에 간다. 그렇게 만든 멸치 가루는 다양한 요리에 활용할 수 있다. 멸치의 풍부한 칼슘을 섭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시동을 걸면 부르릉 떨며 출발하는 자동차처럼 육수만 있으면 국과 찌개는 언제라도 바락바락 끓어댈 것이다. 고장 난 자동차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날도 있는 반면 심신의 에너지가 남아도는 날도 더러 있다. 그런 흐뭇한 날엔 푸근한 마음으로 넉넉히 육수를 우려 보면 어떨까. 기꺼이 수고를 자청한다면 멸치 대가리마저도 질 좋은 육수의 바탕, 곧 든든한 집밥 지원군이 되어 줄 테니.



육수(맛국물)라는 베이스가 확실하다면 집밥은 지속 가능하다. 집밥은 베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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