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현 Mar 12. 2021

집밥은 몰입이다

헤이 카카오! CBS음악 FM틀어줘.

"헤이 카카오! CBS 음악 FM 틀어줘."

요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습관처럼 우리 집 헤이카카오를 부른다. 그러고서는 언제나처럼 가장 즐겨 듣는 라디오 채널을 주문한다.

"CBS 음악 FM 틀어드릴게요."

스마트 스피커의 착한 대답과 함께 아름다운 선율이 전주처럼 깔리면 그제야 주방일에 나선다.



라디오는 막막한 살림과 육아의 여정을 수년째 함께 해온 정다운 길벗이다. 집안일에 파묻히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을 때에도 귀만큼은 라디오를 향해 활짝 열어둘 수 있었다. 그는 언제라도 함께 할 수 있는 부담 없는 친구다. 라디오 진행자의 진심 어린 멘트 한 마디에 힘을 얻고 마음을 다독여주는 멜로디에 기분이 밝아지곤 했다. 그의 존재란 얼마나 크고 든든한지, 적어도 나는 아예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을 건네받곤 한다.



영유아기 자녀를 둔 엄마에게 주방일은 전투자 생존 그 자체다. 요리란 지극히 육아의 일부요, 음식을 만드는 시간과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어지러이 혼재되어 있게 마련이다. 얼마 전까지 나의 경우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나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던 긴 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기분이다. 둘째의 입학과 더불어 두 아이 모두 초등생이 되면서 내게도 얼마간의 자유와 한가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제는 아이들을 돌보는 틈새로 짬을 내어 요리하기보다는 시간을 뚝 떼어내 느긋하게 주방에 서는 걸 좋아한다. 언제나 다감한 내 친구 라디오와 함께 말이다. 라디오의 사연과 선율에 마음을 함께 하며 요리에 몰입하는 시간, 그 시간을 끔찍이도 사랑한다.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적어도 대중없고 예측 불허한 아이들의 요구와 질문이 불순물처럼 섞이지 않은.



밀가루 없이 부쳐낸 팽이버섯전



여유를 가지고 식재료를 다루다 보면 기특한 생각이 퐁퐁 솟아오른다. 여유는 고정관념과 습관을 허무는 힘이 있다. 덕분에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도 더욱 영양가 있는 음식을 수월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라디오를 들으며 놀이터에 간 아이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다. 팽이버섯을 사용하면 밀가루 한 스푼 풀지 않고 전을 부쳐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팽이버섯 가닥가닥이 계란물을 꼭 붙들어주기 때문이다. 쓰인 재료라고는 팽이버섯, 계란, 파, 당근 땡! 동그랑 땡! 어린이들 반찬 걱정도 땡!



누룽지 삼계죽


어느 날엔 압력솥에 밥이 눌었다. 이전 같았으면 새로운 요리에 앞서 누룽지죽이든 숭늉이든 끓여 솥을 깨끗이 비워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 요리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십분 활용하면 더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



밥이 눌은 솥에 그대로 닭을 삶고 죽을 끓였다. 누룽지 삼계죽, 밥알이 쫀득하고 맛이 고소해 의외의 별미가 되었다. 이전엔 당연하다 여겼던 삶의 큰 틀이 무너진 상황에서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자.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의외로 일이 잘 풀리는 수도 있겠지.

   


어느 여름날의 깻잎 페스토
바질 파스타만큼 향미 진한 깻잎 파스타


여름 뙤약볕이 좀체 사그라들지 않는 시기, 친정 엄마는 손수 가꾸시는 텃밭에 깻잎이 흐드러지면 이 많은 깻잎을 어찌 할꼬, 어찌 할꼬 하신다. 그러고는 얼마간의 지분을 서울 사는 딸에게 맡긴다. 친정에서 보내주시는 각종 채소는 귀하디 귀하지만 엄청난 양을 한꺼번에 소진해야 하는 큰 숙제가 되기도 한다. 박스떼기로 올라온 엄청난 양의 깻잎 앞에 망연자실하다가 깻잎이야말로 동양의 허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꼭 깻잎으로 페스토를 만든다.



조리는 바질 페스토를 만드는 방식을 따른다. 아껴두었던 잣을 마른 팬에 살짝 굽고 그라나 파다노 치즈를 간다. 올리브유를 듬뿍 끼얹어 세척한 깻잎을 함께 갈면 끝이다. 과정은 간단치만 오일을 사용한 만큼 뒷처리는 만만찮다. 그러나 괜찮다. 주방에서 큰 일을 벌일 때는 라디오 음악이 노동요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삶은 감자 한 알에 페스토를 한 스푼 올려 살짝 으깨 먹어도 좋다. 깻잎 파스타를 만들어 먹어도 후회 없는 맛이다.  





라디오는 내게 '지금이 요리할 시간'이란 사실을 부드럽게 일러주곤 한다. '이수영의 12시에 만납시다'의 bgm이 기분 좋게 흘러나오면 점심준비를 위해 주방에 선다. 오후 6시 '배미향의 저녁스케치'의 시작과 함께  스티브 바라캣(Steve Barakatt)의 '더 휘슬러스 송(The Sjistlers Song)'이 들리면 휘파람을 불며 즐거운 저녁 준비에 들어간다.



잘 정돈된 라디오의 사연, 그리고 자신 있게 흘러가는 라디오 음악에 하루를 무탈하게 지냈다는 안도와 함께 오늘 밥도 잘 지어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이전 06화 집밥은 베이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