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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양말 구멍 정도가 되는 날

<작은 죽음이 찾아왔어요>

by 시루


“죽음은 작고 상냥해요.”

키티 크라우더의 그림책 『작은 죽음이 찾아왔어요』를 펼치자마자 멈칫했다. 작고 상냥한 죽음이라니, 얼토당토않은 말에 당황했던 걸까. 내가 겪은 죽음은 대체로 갑작스럽고 날카로웠기에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림책에는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커다란 낫을 든 존재, ‘작은 죽음’이 등장한다. 자신을 보면 기겁하거나 눈물짓던 사람들과 달리, 먼저 말을 걸고 친구가 되어준 엘스와이즈를 만나면서 죽음 너머의 새로운 면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나는 기겁하며 눈물을 흘릴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아직 ‘작은 죽음’을 만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을 수없이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죽음의 손을 잡고 강을 건너게 될 내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어딘가 정적을 뚫고 오는 듯한 전화벨 소리, 다급함을 억누르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 심장이 꺼질 듯하지만 정신을 붙들며 달려가야 할 마지막 장소. 그곳에 남겨질 내 사람들의 고통과 막막함을 떠올리면 견딜 수 없으면서도, 자꾸만 그 장면들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소식을 듣고 모였을 가족들 사이에서 한눈에 언니를 찾았다. 그대로 달려가 마른 얼굴을 감싸안고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자마자 아이들을 챙겨 비행기를 탔지만, 어스름한 저녁에야 도착했던가. 겨울 한기 가득한 병원 복도에서 이미 눈물도 다 말라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도 다시 눈물이 흐르는 사람. 그리고 저 건너편에서 닮은 눈을 하고 앉은 또 몇 사람. 넋이 나간 얼굴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며 며칠이 흘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 유난히 하얗게 흩날리던 눈과 함께 흙이 덮였다. 나는 차갑게 떨어지는 마른 흙 소리를 견디며, 언니를 부축해 서 있었다. 애끓는 슬픔을 겨우 붙들어 안으며 그 고통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흘러와 박히도록 두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게 죽음이란 이렇듯 어느 날 갑자기 큰 구덩이가 파헤쳐지듯 벼락같은 일이었다. 더 이전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긴 투병 끝 죽음 역시 예상하지 않은 어느 평범한 날에 찾아왔던 것 같다. 집에서 장례를 치렀던 덕분에 할머니의 죽음이 어린 나에게 육신의 소멸을 고스란히 보여줬다면, 이후에 맞닥뜨린 갑작스러운 죽음들은 이별 후 남겨지는 절망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육신의 부패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떠난 사람은 한 번의 마침표로 이별이 끝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 그 마침표는 끝없이 반복될 검은 점일 뿐이다. 때로는 거대한 산처럼 나를 가로막는, 검은 점.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힘들어하냐고 누군가 내게 물었다면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그 큰 불안과 책임 앞에 굳건히 아이들을 끌어안고 뚜벅뚜벅 나아가는 언니가 산보다 더 커 보여서,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속은 까맣고 까맣게 이미 타버린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라는 두려움과 ‘내가 견디지 못했을’ 경우 내 아이들의 미래가 자꾸만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의 마지막 말이 다정한 인사였어.”

언니의 말은 내게 큰 약속처럼 박혔다. 서로의 출근길에 걱정과 다정을 담은 인사를 나누었던 아침이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하루아침에 아빠 잃은 어린 조카들을 위해 더 힘을 내어 일상을 되찾으려는 애씀을 다독이기 위해, 퇴근길 대화 상대를 자처하던 계절들이 흘렀다. 가끔 ‘네가 있어 다행’이라는 인사를 들었지만, 사실 그 당시 언니의 단단한 말들이 내 두려움을 많이 잡아주었다는 걸 고백한다. 수 없는 몸부림과 눈물 후에야 뱉어낼 수 있었던 말들.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을 겪은 사람이 오히려, 이별을 상상하는 괴로움을 달래준 것이다.

어느덧 우리 집 현관 앞은 인사를 위한 곳이 되었다. 집을 나서는 누구라도,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를 전한다. 출퇴근길, 등굣길 포옹과 인사는 빠질 수 없는 약속이다. 아직 한 번도 내 두려움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뜻밖의 상실을 함께 경험한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무탈한 하루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말이다.


‘작은’ 죽음이란 없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모를 인생, 백 가지 갈래 앞에서는 죽음 또한 보이지 않는 한 갈래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언니는 마치 다시 골목이 앞을 막으면 그 벽을 뚫고서라도 헤쳐나갈 듯 보였고, 더 짙어진 사랑 아래에서 조카들 역시 자신들의 일상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잘 커 주었다. 아직도 우리는 가끔 눈물을 머금은 안부를 하늘에 전하며, 서로 기대어 이야기하지만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죽음 너머 미지의 세계를 떠올리고, 아이들을 슬픔에 던져놓고 떠날까 두려운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의 인사를 전하며 내 하루를 더욱 단단히 채우고 있다. 허공을 떠도는 위안에 그치지 않고, 잘 붙들어 매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짧은 글일지라도 하루하루에 남기는 인사라 생각하니, 건강한 일상을 살 수 있는 단단한 바닥처럼 느껴져 계속 쓰고 싶어졌다. 삶과 죽음의 얄팍한 경계를 두려워만 하지 않고, 지금 내게 소중한 기억들을 잘 그러모아 글로나마 엄마의 당부를 남겨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는 딸들을 향한 글에서 나를 위한 기록으로,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로 확장되어 갔다. 글을 쓰다가도 문득 영영 닿지 못할 어느 날이 두려워지더라도, 미래를 향해 인사하고 싶어졌으니 꽤 많은 모퉁이를 씩씩하게 돌아 나왔나 보다.


키티 크라우더 작가 역시 이 ‘작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거대한 슬픔과 절망의 구덩이가 당장은 힘들겠으나, 점점 작아져서 작은 양말 구멍 정도가 되는 날이 있다고 말이다. 가끔 양말이 다시 주욱 늘어나 커져버린 구멍을 보며 또 슬퍼질 날이 있어도, 그 구멍 너머의 알 수 없는 빛을 믿어볼 일이다. ‘어라, 오늘은 구멍이 좀 커졌네?’ 피식 웃으며 슬쩍 발가락을 매만지고 걸어봄직도 하다. 그렇게 성큼성큼, 환한 곳을 향해 오래도록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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