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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Aug 15. 2023

과테말라, 예상 못한 고난과 쉼표 같았던 고독

활화산과 중미 커피 찾아 과테말라에 홀로 들어가다 


멕시코 칸쿤에서 멕시코시티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과테말라 안티구아로 향했다. 페루에서 체력을 소진해 아카테낭고 활화산 투어는 포기했다. 멕시코에서 호수나 세노테 위주로 돌면서 쉬다 보니 체력이 회복됐다. 활기를 되찾자 렌터카 타고 편안히 여행하는 게 지루해졌다. 그러다 아카테낭고 활화산 투어를 다녀온 이들이 한결같이 매우 아름다워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라며 과테말라행을 부추겼다. 바야돌리드 숙소에서 눈을 뜨자마자 전날 봤던 용암을 분출하던 푸에고 화산이 떠올랐다. 아카테낭고 화산에 오르면 맞으면 푸에고 화산의 폭발을 볼 수 있다. 침대보를 젖히며 과테말라에 가서 활화산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항공편으로 과테말라 수도 과테말라시티로 들어가서 바로 안티구아로 향했다. 공항에서 15달러 주고 밴을 탔다. 미국 휴스턴에서부터 멕시코 거쳐 과테말라까지 자전거로 여행하는 일본인 유세를 만났다. 유세는 자전거가 고장 나서 멕시코시티로 가서 새 자전거를 주문한 뒤 항공편으로 과테말라시티를 거쳐 안티구아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밴에서 동양인이라고는 둘밖에 없다 보니 한일 양국도 이웃이라고 안티구아까지 가는 내내 떠들었다. 과테말라시티에서 안티구아로 가는 밴 안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꼴이라니.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걸어서 서 15분 거리 떨어진 투어사로 가서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1박 2일 아카테낭고 투어와 남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는 아티틀란 호수로 가는 교통편을 예약했다. 아케테낭고 화산 투어는 아침 일찍 안티구아를 출발해 아카테낭고 화산을 걸어서 올라 건너편 푸에고 화산을 보는 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도 3000m 넘는 산악을 걸어 올라가는데 4km 트레킹 하는 동안 1km 넘게 치고 올라가야 하므로 매우 힘든 코스다. 식수 3리터와 음식, 방한 장비를 가져가야 하는 터라 등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3600m 고지에 설치된 베이스캠프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새벽에 일어나 푸에고 화산의 분출을 지켜본다. 일부는 푸에고 화산으로 넘어가 발목까지 묻히는 화산재를 밟고 용암 가스를 마셔가며 분화구로 향한다. 아카테낭고 화산에 오른 뒤 컨디션을 보고 푸에고 화산으로 갈지 여부를 결정할 거다. 매우 힘든 구간이라 가는 이가 적어 푸에고 화산 등정은 무산되는 일이 많다. 최소 3명 이상이 모여야 가이드가 푸에고 화산으로 출발한다. 

활화산에서 내려와 숙소에서 쉰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아티틀란 호수로 간다. 체 게바라마저 혁명을 포기하고 아티틀란 호숫가에서 살고 싶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에서 하루 잔다. 호숫가를 거닐고 카페에서 과테말라 안티구아 커피를 마실 거다. 화산재의 향을 듬뿍 담고 자란 안티구아 커피는 맛이 깊고 향이 짙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티틀란 호숫가에는 여러 마을이 있다. 그중 파나하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로코카페가 유명하다. 이곳에서 남미사랑 카카오 단톡방에서 인사를 나눈 녹색사랑을 만나기로 했다. 체게바라가 반한 멋진 호숫가에서 화산의 향을 담은 커피를 마실 거다. 

해야 할 일을 마치자 데스파치오(느리게) 템포로 안티구아를 걸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과테말라를 장악한 뒤 안티구아에 총독 관저를 세우고 수도로 삼았다. 스페인들은 안티구아에 바로크 풍의 성당, 수도원, 학교 건물이 지었다. 스페인 본국보다 더 멋지게 지었다고 하니 전성기 안티구아는 중미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였을게다. 안티구아의 몰락은 활화산 탓이다. 안티구아가 아케테낭고, 푸에고, 아구아 활화산 사이에 끼어 있는 분지라서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가 가중되었다. 그러다 1773년 화산 폭발로 도시가 화산재에 묻히게 되자 수도를 과테말라시티로 옮기고 이 도시는 버려졌다. 최근에야 화산 폭발의 흔적을 지우고 18세기 스페인 바로크풍 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로 재건됐다. 지금은 활화산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여행객들이 몰리는 관광 도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잠 한숨 못자고 활화산 오르며 죽음의 고통 실감


오전 9시쯤 안티구아 숙소에서 투어사 밴을 탔지만 투어 동행자들을 일일이 픽업하느라 10시 지나서 아카테낭고로 향했다. 이탈리아인 루카스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폭풍 질문을 쏟아냈다. 국적이야 이탈리아인이지만 독일어를 먼저 배웠다. 고향이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라서 어려서부터 독일어 쓰는 가정에서 자라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운 것이다. 독일 국적 알렉세이와 죽이 맞아 둘이서 움직일 때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알렉세이는 8살까지 러시아에 살다가 부모 따라 독일로 넘어와 독일에서 자랐다. 독일어를 더 잘 구사하는 이탈리아인, 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인 알렉세이, 토종 한국인 이상한 조합이지만 셋은 바로 친해졌다. 

루카스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알렉세이는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를 말한다. 나야 한국어, 영어를 구사하고 스페인어와 일본어를 읽고 쓸 줄 안다. 루카스는 마흔이다. 자기가 제일 연장자라서 생각했는지 내 나이를 알고 크게 놀라는 표정이란. 알렉세이는 더 없어 착하다. 셋은 체력도 비슷하고 등산 역량도 탁월해 등산 초기 분위기를 주도하며 앞장서서 올랐다. 3000m까지는 그리 분위기가 좋았다. 고도가 3400m를 넘어가자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 근육의 피로도가 급상승했다. 두통과 함께 어지럼증이 나타났다. 고산병이 재발한 거다. 

푸에고 활화산 앞에서. 3주 전에 터져서 그런지 용암 분출의 장관을 보여주지 않아 서운

앞장서 가다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단이 앞서가고 네덜란드인 단이 추월했다. 음식을 잘못 먹어 아픈 미국인 제리와 등산 경험이 적은 여성들만 뒤에서 쫓아왔다. 다시 속도를 냈다. 그랬더니 처음 겪는 일이 발생했다. 왼쪽 허벅지에 경련이 생겼다. 스틱을 한쪽만 쥐고 오르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허벅지에 힘을 가했나 보다. 스틱을 바꿔 쥐니 이번에는 오른쪽 허벅지에 쥐가 났다. 등산하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결국 뒤로 처져 내 페이스로 등산 속도를 최대한 늦췄다. 결국 고도 3600m 베이스캠프에 가장 늦게 도착했다. 

두통과 어지럼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저녁식사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 다른 친구들은 마시멜로 구워 먹으며 시끌벅적했다. 귀마개까지 박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다른 친구들도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 3시 45분 아카테낭고 화산 정상에 있는 푸에고 활화산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야 한다. 당초 예상보다 일찍 잠자리를 마련하느라 부산대는 통에 잠에서 깼다. 그런데 갑자기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숙소 근처 화장실은 죽을 지경에 처해도 가고 싶지 않을 모양새다. 대자연을 바라보고 대변을 해결해야 했다. 

거의 40년 만에 앉아쏴 자세를 취하니 다리에 쥐가 났다. 4시간 동안 고도 1km를 높이다 보니 급경사길을 계속 걸은 상태라 근육이 뭉쳐있는데 안 하던 앉아쏴 자세는 상당한 고통을 안겼다. 아구아 화산 옆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는 걸 보며 앉아쏴 하는데 주인 없는 들개가 옆으로 다가왔다. 등산객 따라다니며 등산객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개들이라 겁먹지 않았지만 개라도 누군가가 그 어색한 모습을 지켜본다는 게 반갑지는 않았다. 그날 먹은 게 많은 탓에 엄청나게 많은 배설물을 자연에 남기고 얼른 침낭으로 돌아갔다. 온몸이 얼었다. 과테말라가 적도 부근이지만 해발 4000m 가까운 산지라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그 추위에 엉덩이를 까고 불편한 자세로 한참 앉았다 일어난 탓에 체온이 크게 떨어졌다. 찬 공기 탓에 두통은 더 심해졌다. 미국인 제리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며 앓았다.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가이드 텐트에 가서 가이드를 깨워 도움을 청했다. 제리는 결국 가이드가 주는 약과 차를 마시고 가이드 텐트에서 자야 했다. 나는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새벽 3시 45분 가이드 기상 소리에 깼다. 

고산병 증세는 심해지고 잠은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 정상에 오르려 하자 가이드가 등반 포기를 권했다. 정상까지 코스가 급경사인 데다 화산재가 가득해 발목이 잠겨 미끄러워 정상 컨디션에서도 힘들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정상은 아주 추워 고산병에게 치명적이었다. 속은 뒤집어졌고 잠은 못 잤고 두통과 어지럼증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정상에 가겠다고 고집부렸다. 미국인 제리는 속이 좋지 않아 정상 등반을 포기하고 베이스캠프에 남기로 했다. 가이드가 거듭 제리와 남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가이드 말을 무시했고 앞장서 걸었다. 

등산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후회했다. 핸드폰 조명에 의존해 내딛는 길은 화산재로 가득해 발목까지 묻히며 계속 미끄러졌다. 하이킹 베테랑 루카스마저도 계속 밀렸다. 경사도 아주 가팔랐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뒤처졌다. 속이 뒤집어지고 어지러워 스틱을 기대어 한참 쉬다 가다 하니깐 뒤에서 따라오는 다른 등반팀원들이 괜찮냐고 물어보며 지나쳐 갔다. 

내 호흡과 페이스를 찾아야 했다. 살칸타이 트레킹처럼 열 발 올라가고 5초 쉬었다가 다시 열 발 올라가고 5초 쉬는 등반법을 다시 꺼내 들었다. 등산길이 어둡다 보니 우리 일행은 여러 차례 쉬면서 내가 올라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올랐다. 그들은 나를 기다리면서 충분히 쉬지만 내가 일행을 따라잡으면 다시 출발하니 정작 나는 쉴 틈이 없었다. 끝도 없이 하늘로 이어지는 행렬을 보고 있자니 주저앉고 싶어졌다. 위를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흘러내리는 돌자갈만 바라보고 한 시간가량 오르니 갑자기 시꺼먼 흙이 펼쳐졌다. 고개를 드니 일행이 전망대 주위에 모여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보였다. 루카스와 알렉세이는 벌써 정상 주위를 멀리 한 바퀴 돌고 있었다. 다들 고산병 없이 잘 오르는데 왜 나만 고산병에 걸리는지 속이 상했다. 

힘겹게 정상에 올라 맞은편 푸에고 화산을 바라봤지만 이놈의 활화산은 흰 연기만 모락모락 나올 뿐 용암을 분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주 전 크게 폭발한 다음 조용하다고 한다. 그 반대편에 구름 위로 우뚝 솟은 아구아 화산을 더 멋졌다. 해가 떠오르자 구름에 담긴 일출의 색을 배경으로 구름 위로 실루엣만 보이는 게 근사했다. 산 하나가 달랑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모습을 국내에서 보기 힘들다 보니 낯설고 신기했다. 찬 바람을 맞으며 인증 샷을 촬영한 다음 다시 내려갔다. 베이스캠프에서 아침식사를 먹는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아침식사도 거르고 하산을 시작했다. 고도 3000m 밑으로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두통과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다리 근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다음에는 뛰다시피 하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참으로 기이하다. 고도가 높은 게 이리 치명적일 줄이야. 나는 앞으로 고도가 낮은 곳에 살 운명인가 보다.



체게바라가 사랑한 호수, 아티틀란에서 과테말라 커피의 진수 맛보다


안티과에서 콜렉티보를 타고 3시간가량 달려 아티틀란 호수에 왔다. 체게바라가 혁명을 포기하고 눌러 앉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니 보고 싶었다. 아티틀란는 해발 1562m에 있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칼데라 호수다. 중심지라할 파나하텔에서 호수 너머로 수호신처럼 버티고 선 2개 산을 볼 수 있는데 왼쪽이 아티틀란 화산이고 오른쪽이 톨리만 화산이다. 그 화산을 포함해 호수 주위를 병풍으로 둘러싼 산과 봉우리 아래로 최대 수심 340m, 평균 수심 220m 호수가 자리한다. 총면적은 130 평방km로 여의도 면적의 44배나 된다.

호수 주위에는 11개의 크고 작은 마을이 있다. 파나하첼이 중심지고 산페드로 산티아고 등 예수 그리스도 12제자 이름을 딴 마을이 호숫가를 따라 자리한다. 산페드로는 가성비 좋은 숙소가 많아 전 세계 배낭족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호수 전체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있는 산후앙은 최근 떠오르는 명소다. 파나하첼에서 보트를 타고 호숫가 마을로 건너간다.

기대가 너무 컸나. 얼마나 아름답길래 체게바라가 혁명까지 접고 눌러 앉고 싶나 기대했으나 실제로 보니 우리나라 산정호수보다 못했다. 구름이 잔뜩 껴 시야가 나쁜 탓인가. 호수 너무 화산들이 안개 속에 잠긴 것처럼 뿌옇게 보였고 호숫가는 쓰레기로 넘실거려 산중 호수치고는 맑지 않았다. 호숫가를 따라 마구잡이로 늘어선 식당들이 관광객 상대로 호객하느라 시끄러웠고 기념품 파는 간이 상점이나 좌판들이 어지럽게 들어섰다. 나룻터에는 모터를 단 보트들이 호수를 건너는 관광객을 태우고 잇달아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체게바라가 이런 혼란스러운 광경을 본다면 이곳에서 여전히 살고 싶을지 의심스럽다.

파나하첼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곳은 로코 카페였다. 한국인 청년 여섯명이 중미 지역 커피를 연구하기 위해 과테말라 파나하첼에 왔다가 눌러 앉아 연 카페가 로코다. 카페 영업은 부업이라 할 정도로 과테말라 커피 농장과 협업해 원두 재배, 프로세싱, 건조, 수출까지 커피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다. 대표 격인 배상준씨는 스무살에 과테말라에 왔다가 눌러 앉아 11년째 커피 사업을 벌이고 있다. 배낭 여행 왔다가 주저 앉은 청년부터 원두 수입업을 하다가 합류한 사업가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모여 일하고 있다.

카페 로코에서 맛본 커피는 중남미에서 마신 커피 중 최고였다. 화산재 속에서 짙은 향을 품고 자란 원두로 내려 맛은 깊었고 향은 짙었다. 따뜻한 커피와 아이스 커피 2잔을 마셨다. 둘 다 맛과 향이 기가 막혔다. 한국에 수입해 커피숍을 열고 싶을 정도였다. 카페 로코가 현지 커피 농장과 협업해 만든 원두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한국인이 있다고 해서 그냥 커피를 즐기는 여행객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티틀란 호수를 중심으로 관광객 상대로 영업하는 과테말라의 작은 마을에 불과한 파나하첼에서는 하루만 머물기로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숙소 셀리나 아티틀란에서 전 세계 배낭족과 어울리며 수영이나 즐기다 안티과로 돌아가려 한다. 호수 너머 산후안을 다녀올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숙소에서 쉬다가 내일 일찍 안티과에서 가서 쿠스코 다음으로 마음에 든 도시를 산책하며 과테말라의 여행을 정리하기로 했다.


고독의 여행의 쉼표


과테말라 옛 수도 안티과에서는 커피 나무가 화산재 속에 뿌리 내린다. 커피 나무가 화산 가스를 흡입해서일까. 안티과 커피에는 화산재의 향이 난다. 신맛은 적고 카라멜 맛이 강해 담백하고 향긋하다. 과테말라에 들어온 뒤로 날마다 커피 2잔 넘게 마셨다. 5월말 어느 비오는 날 어김없이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아카테낭고 화산(3880 m)에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온 터라 피곤했지만 과테말라 안티과 커피를 거를 수는 없었다. 지붕 없는 중정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외벽으로 난 창살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중정으로 빠져나가 한낮에도 서늘해 좋다. 안티과에서 날마다 혼자 이 카페를 찾았다. 

오후 늦게부터 햇빛이 가시고 잠시 후덥지근해지는가 싶더니 소나기가 요란하게 쏟아졌다. 카페 중정으로 빗물이 내렸다. 창살 사이로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 외벽으로 난 창을 닫았다. 카페 안은 금새 비에 젖은 커피 향으로 가득찼다. 빗소리는 닫힌 창문을 넘어왔다. 빗소리와 섞인 커피향은 낯선 곳에 홀로 앉은 여행객의 감성을 자극했다.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고독의 향은 에스프레소향보다 짙다. 여행이 문장이라면 고독은 여행의 쉼표다. 그간 낯선 곳에서 급하게 만난 동행과 어울리며 소진한 감정을 추스린다.  

낯선 곳을 여행하다보면 자의반 타의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만남은 잦고 헤어짐은 급하다. 쉽게 친해지고 빨리 헤어진다. 여행의 이유가 맞으면 만나고 행선지가 다르면 헤어진다. 동행이 많거나 잦으면 여행은 번잡스러워진다. 선택의 순간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번잡함이 싫어 홀로 움직이다 보면 교통, 숙소, 투어 예약부터 식사까지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만큼 성가스런 일이 많아진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씻거나 화장실에 갈 때도 여권, 지갑 같은 귀중품을 지니거나 락커에 잠근다. 한국인 동행이 있으면 서로 짐을 봐줄 수 있다. 숙소나 투어 예약도 함께 할 수 있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돌아다닐 때는 소설가 2명과 동행했다.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차를 빌려 시계 방향으로 유카탄 반도를 돌았다. 에이비앤비를 예약하고 차량 렌트비를 분담하니 여행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 닷새가 지나면서 여행이 번잡스러워졌다. 부대끼면서 감정의 선이 팽팽해졌다. 다시 홀로 여행하고 싶어졌다. 유카탄 반도를 한바퀴 돈 뒤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동행과 헤어졌다. 아카테낭고 화산에서 맞은편 활화산이 분출하는 용암을 보고 싶다고 핑계를 댔다. 불과 일주일 전 페루 오아시스 마을 와카치나에서 모래사막을 홀로 걷는게 외로워 동행을 찾던 기억은 벌써 잊었다. 

장기 여행자가 으레 겪는 감정의 변덕이다. 여행자는 인생을 압축적으로 산다. 인생이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면 여행도 다르지 않을게다. 다만 만나고 헤어지는 빈도가 잦고 기간은 짧다. 여행이 즐거우려면 만남과 헤어짐에 능숙해야 한다. 자칫 동행을 잘못 만나면 여행은 엉망이 된다. 특히 헤어짐이 훨씬 중요하다. 낯선 이와 급하게 만나다보니 동행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를 살필 시간의 여유가 없다. 반면 헤어짐은 여행자가 통제할 수있다. 갈등의 불씨가 발화하기 전에 자연스레 헤어지는 법을 배운다. 


그래야 재회할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이 다르면 헤어졌다가 함께 하고 싶은 곳에서 다시 만나는 거다. 낯선 이와 다시 관계를 만드느라 애쓰기보다 익숙한 이와 동행하고 싶어하는 이가 많다. 홀로 여행과 동행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찾아가는 거다. 인생이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을거다. 자기 뜻을 거슬러가며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고집하기보다 함께 하고 싶은 곳에서 선택적으로 동행하는 삶이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만의 여행을 즐길 수 있고 상대의 고독을 존중하는 이가 즐겁게 여행한다. 우리는 혼자 지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함께 어울리며 고독을 갈망하는 존재다. 여행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한다.  


비가 잦아들고 커피향이 사라지자 그리운 이가 떠올랐다. 파타고니아 여행 초기 피츠로이 산을 함께 오르고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 코스를 함께 걷던 이가 보고 싶었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다음 행선지는 그가 있는 곳이다. 파타고니아를 떠나면서 애써 헤어진 친구다. 그리움이 내뿜는 향을 음미하며 카페를 나와 빗속의 안티과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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