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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Nov 25. 2021

역사탐방에세이 20화

 단종 장릉(莊陵)  - 하늘은 귀 먹어서

  단종의 능은 영월에 있어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는 좀 버거운 거 같아 탐방 순서를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지호맘에게서 1박도 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 이때다 싶어, 바로 다음 날로 날짜를 잡았다. 경찬맘이 기차를 예매하고, 숙소와 렌트카를 검색하고 계약금을 송금하는 등, 수고로운 일들을 기꺼이 해주었다. 

  단종이 묻힌 장릉으로 탐방 가기 전날 잠이 쉬이 들지 않았다. 단종에 대해 역사책을 통해 배운 지식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소설 등이 뒤죽박죽 순서도 없이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청량리 역에서 동해선 기차로 갈아탔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 남짓 가니, 다음 역은 영월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단종은 열흘에 걸려 유배지인 영월 땅에 도착했다는데, 기차는 두 시간 만에 우리를 한양에서 영월까지 데려다주고 동해로 떠났다. 


   영월 역사를 빠져나온 나는 눈을 들어 멀고 가까운 산들과 하늘을 올려다보며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탐방 간 날은 음력으로 10월 13일이었다.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날이 음력으로 10월 24일이었으니, 풍경이야 지금과 달라겠지만 산빛과 하늘빛이야 얼추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몰래 한숨이 나온 것이었다. 

  “어휴,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단종을 이 먼 곳으로 보내놓고 죽여야만 할 이유를 못 찾겠어. 세조는 정말 나빠.”

   지호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 했다. 우리는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도, 세조의 능인 광릉에서도 단종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우리는 능의 구조나 석물보다 왕과 왕비의 생애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화가 났다. 이심전심이랄까. 기차에서 나만 단종을 생각하며 온 게 아니었다. 

  “한양에 있든 영월에 있든 죽이려 들었을 거예요.”

  나는 단종에게 사약이 내리기 달포 전에 의경세자가 사망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단종이 사망하던 그해 음력으로 9월 2일에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 소생으로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은 그때 겨우 8세에 불과했다. 만약 세조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8세에 불과한 해양대군이 세조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것인데, 세조나 세조를 도와 왕위찬탈에 공을 세워 권력의 단맛에 취해있는 공신들에게, 유배가 있기는 하지만 17세로 장성한 단종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단종이 누군가. 그는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다. 할아버지인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 세종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문종의 적장자로 태어났기에, 원손 세손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유일한 왕이다. 혹여 세조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8세인 해양대군보다는 17세인 단종에게 왕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 단종의 자질이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된 세종의 장손이라는 정통성 때문이다. 만약 단종이 다시 돌아와 왕위에 앉는다면 그들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어린 왕을 겁박해 왕위를 찬탈한 그들이었다. 그때는 어려서 왕위를 빼앗기고, 자기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겠지만, 청년이 된 단종이 다시 돌아와 왕위에 오른다면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단종을 죽임으로써 후환의 싹을 아예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영월 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다슬기 해장국으로 점심을 먹은 우리는 차를 렌트해 청령포로 향했다. 

  

 허울뿐인 상왕으로 창덕궁에서 숨을 죽이고 살고 있던 단종은 양위한 지 이년 후(1457년 세조 3년 음력 6월 21일)에는 한양에서 700리 떨어진 영월 땅으로 유배 가는 신세가 되었다. 유배길에 나선 단종이 동대문을 벗어나자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눈물로 배웅했다. 

  

  궁궐을 떠난 단종은 열흘 정도 걸려 유배지인 청령포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기록은 없는데, 단종이 지나갔던 곳으로 추정되는 고개나 마을에 단종과 관련된 지명설화들이 내려오고, 그것을 근거로 단종 유배길을 재현하였을 때 그리 걸린다고 한다. 단종은 음력으로 6월 22일 궁궐을 나섰는데, 양력으로는 7월 말쯤이다. 무척 더울 때이다. 큰 강과 작은 내를 건너고 높고 낮은 고개를 넘으며, 왕이었다지만, 아직 소년에 불과한 단종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단종이 유배길에 넘어갔다는 고개 중에 ‘배일치재’라는 곳이 있다. 단종이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면서 절을 하였다고 하여, 그 고개 이름이 ‘배일치'가 된 것이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두려움, 강제로 헤어진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 돌아가신 세종과 문종, 얼굴도 본 적 없어 그리움으로 남은 생모, 생모 대신 젖을 물려 키워준 혜빈 양씨, 자신을 위한 충절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을 비롯한 신하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역적으로 몰아 유배형에 처한 세조에 대한 원망, 유배길에 나선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착한 백성들. 이 모든 것들이 어린 왕을 울렸을 것이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절을 할 정도로 절박했을 것이다. 


<단종 유배지 청령포>


  강원도 영월군 남면 청령포. 삼면은 강이 휘돌아 흐르고, 한쪽 면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올라있어 섬과 같은 청령포는 배를 타지 않고는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곳이다. 우리 일행도 배를 타고 들어갔는데, 견학 온 한 무리의 소년 소녀들과 같이 배를 탔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작은 돌멩이를 손에 들고 강으로 던지며 누구의 돌멩이가 더 멀리 가는지 내기하며 키득거렸다. 나이를 물으니 열세 살이라고 했다. 단종은 이 아이들 나이에 고립무원 신세로 구중궁궐에서 떨고 있었다. 단종이 내시와 궁녀들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임금 집안에 태어난 게 불행’ 

    물수제비를 뜨며 내기를 하고, 친구에게 손으로 물방울을 튀기고 뛰어가면서 키득거리는 아이들. 나는 한 무리의 소년 소녀들의 노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 문종에게서 어린 왕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받은 고명대신들이 숙부 수양대군의 손에 제거되는 상황에 맞닥뜨린 소년이 느껴야 했던 공포와 두려움을 떠올려보았다.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여의었고, 열두 살 나이에 아버지마저 여읜 아이였다. 가만두어도 슬픔이 늪처럼 아이를 빨아들였을 텐데, 거기에다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가련한 운명에 놓인 어린 왕. 어린 왕이 보위에 오르면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하는데, 불행하게도 단종에게는 그런 복도 없었다. 생모인 현덕왕후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하였고, 아버지인 문종은 현덕왕후 승하 후에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왕대비 자리마저 공석이었다. 혜빈 양씨가 단종에게 젖을 물리며 친자식보다 더 애정을 기울여 양육하였다지만, 혜빈 양씨는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의 후궁이었다. 수렴청정할 권한이 없었다. 오히려 왕위찬탈을 노리고 있던 수양대군은 단종이 의지하던 혜빈 양씨가 어린 왕 곁에 머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린 왕은 그야말로 고립무원 신세가 된 것이었다.     

 

 청령포에는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지닌 수령 600년이 넘는 큰 소나무가 있는데, 단종과 관련된 설화를 간직한 나무다. 단종은 유배 생활을 할 때 소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걸터앉아 때때로 오열하였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그런 단종의 모습을 보고, 울음소리를 들은 나무라 하여, 관음송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나는 눈을 들어 관음송을 바라보았다. 서럽게 울고 있는 소년 왕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관음송>

  

  또한 청령포에는 막돌로 쌓은 탑이 있는데, 망향탑이라 불린다. 유배 온 단종이 한양을 그리워하며 쌓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탑을 이루고 있는 막돌 하나하나에 단종의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있을 거 같아,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절해고도 같은 이곳에 유배 온 소년 왕이 어떤 마음으로 저 돌들을 주워다 쌓았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불안, 초조, 두려움, 그리움, 원통함, 서러움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홀로 놓인 소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소나무에 걸터앉아 오열하거나, 저 막돌을 주워다 쌓아 올리는 일이었으니……. 


<망향탑>


   단종은 청령포에서 두 달 정도 유배 생활을 했다. 영월 군수에게서 장마에 불어난 물이 거처로 들이쳤다는 사정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영월 관아인 관풍헌으로 옮기라 명했다. 단종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은 청령포가 아니라 관풍헌이다. 실록에는 노산군(단종)이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사약을 마셔 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야사는 단종의 죽음을 아주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사약 마시는 것을 거부하자 통인 하나가 공을 세우겠다며 나서서 활줄을 풀어 단종을 목 졸라 죽였다고도 하고, 사약을 마시기를 거부하고 방에 들어간 단종이 자기 스스로 활줄을 목에다 걸고 방 밖에 있던 통인에게 잡아당기라고 해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단종은 아홉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즉사하였다고 하며, 단종의 목숨을 끊은 부득이라는 이름을 가진 통인은 마당에 나서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얌전히 사약을 마셨던, 활줄에 목이 졸렸던, 그 어떤 경우에도 단종의 죽음은 너무 비극적이다. 겨우 열일곱, 만으로는 열여섯 살이었기 때문이다. 단종이 죽자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고, 맹렬한 바람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자욱히 깔려 밤새 걷히지 않았다고 전한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실록의 기록보다 야사의 기록을 더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단종이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두고, 양위가 아니고 찬탈이라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영월 호장(시골 관아의 우두머리, 이방) 엄흥도였다. 엄홍도는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수의를 입혀 지게에다 지고 선산으로 가서 묻어주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그는 아들을 데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목숨 건 엄홍도의 충정이 아니었다면, 단종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할뻔하였다.


  단종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를 갖게 된 것은 단종 사후 오랜 시간이 흐른 숙종 때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의리와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게 된 덕분이다. 성리학자들은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주창했고, 숙종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


  우리는 서둘러 단종의 무덤이 있는 장릉으로 향했다. 청령포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단종이 사약을 마시기 전에 읊었다는 ‘자규시’의 내용을 떠올리며 장릉을 향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한글로 번역한 것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원한 맺힌 새 한 마리가 궁중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恨은 끝이 없구나

   자규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먹었나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내 몸의 귀만 홀로 밝은고 


<단종, 여기에 잠들다>



 단종의 능 앞에서 능침을 바라보았다. 능 앞에 무인석이 없다. 다른 왕릉들과 구별되는 특징 중의 하나다.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무인석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유배 생활 4개월 뒤에 금부도사가 왔을 때, 단종은 버선발로 뛰어나가 금부도사 일행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자기를 한양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약을 들려 보낸 것을 알았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 만무하다. 사약을 앞에 둔 단종이 어떤 심정으로 그 시를 읊었을지…….


 -하늘은 귀먹었나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

 소년 왕의 피맺힌 절규가 들리는 듯하여 가슴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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