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담 Jul 08. 2022

역사탐방에세이 21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사릉(思陵)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을 탐방한 다음 이심전심으로 다음 탐방 장소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으로 정해졌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에 갔을 때 관음송 아래 떨어져 있던 솔방울 두어 개와 단종 장릉 앞에서 구르고 있던  낙엽과 솔잎을 몇 닢 챙기고 왔다. 사릉(思陵)에 가게 되면,  챙기고 온 것들을 살포시 놓아주고 싶었다. 만약에 넋이 오가는 길이 있고, 우리가 그 길을 보게 된다면, 영월 장릉과 남양주 사릉 사이의 넋이 오가는 길은 닳고 닳았을 게 틀림없다. 넋이 오가는 길을 확인할 수 없으니,  단종의 혼이 서린 그 장소에 있던 그 어떤 것이라도 단종비 무덤 앞에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물과 우산을 가방 속에 넣으면서 가방 아래쪽에 있던 솔방울이 행여 부서질세라 위쪽에 넣으려고 꺼내놓았다가 다시 집어넣는 것을 깜박한 게  생각났다. 

  “어머, 어머, 어떡하면 좋아.” 

 경찬맘이 운전하는 차가 외곽도로 위로 막 들어섰을 때라, 차를 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리고 지호맘이 기다리고 있다. 그냥 달려야 한다. 경찬맘은 아쉽지만, 사진을 찍고 온 것을 보여주자고 했다. 

  “솔방울 하나도 인연이 닿아야 챙겨줄 수 있나 봐요.”

  “그래서 그 슬픈 이야기가 전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경찬맘이 단종과 단종비를 다룬 소설을 읽으며 울었던 이야기를 했다.      

  

단종과 헤어진 자리에 있는 영도교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떠날 때 정순왕후 송씨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에서 단종과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역모사건으로 유배를 떠난다는 것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는 다시는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 왕심평대교는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이 다리에서 영영 이별을 했다고 해서, ‘영영이별다리,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 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종 때 이 다리를 보수하며 한자명으로 영도교(永渡橋)라고 하였다 한다. 단종 장릉과 단종비 사릉을 탐방하기에 앞서 영도교를 탐방하였다. 몇백 년이나 지나 옛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영도교 옆에 다리의 유래를 알리는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영도교 유래를 설명한 안내표지판


  사릉 입구에 도착했더니,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웬일인가 싶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들어가니, 정순왕후 500주기 제향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날씨가 춥다고 해서 탐방일을 일주일 연기했더니, 이런 광경을 보게 되었구나 싶었다. 일부러 날짜를 맞춘 것도 아닌데, 얼떨결에 제향식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인가 싶었다. 정순왕후 송씨가 나와 같은 여산 송씨라, 탐방 갔다가 제향식을 참관하게 되어 울컥했다고나 할까. 나는 오백 년 전 사람들 때문에 가끔 울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것이다. 조선 왕조 왕비 중에 송씨 성을 가진 왕비는 정순왕후가 유일한데, 그 삶이 너무 비극적이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사릉 전경


  제향식의 마지막 순서에 수고한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여산 송씨 문중 사람들과 더불어 해주 정씨 문중 사람들이 호명되었다. 여산 송씨 문중과 해주 정씨 문중에서 같이 협력해서 제향식을 거행한 모양이었다. 사릉이 있는 자리는 해주 정씨 선산이었다. 정순왕후가 해주 정씨 선산에 묻힌 데에는 사연이 있다. 18세에 단종과 헤어진 정순왕후는 향년 82세에 승하하였다. 단종이 죽은 후에도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다섯 왕을 거치며 60년 넘는 인고의 시간을 살았지만, 그녀가 살아생전에 단종은 복위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중종이 대군부인의 장례로 지내라 명하였지만, 그녀가 묻힐 땅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해서 시누이 경혜공주의 시댁 선산에 묻히게 된 것이었다. 정작 경혜공주의 남편인 부마 정종은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하여 거열형을 당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였다. 경혜공주 묘는 고양시 대자동에 있다. 시누이도 시누이 남편도 묻히지 못한 해주 정씨 선산에 정순왕후가 묻힌 것이다. 혼이 있었다면 기가 막혔으리라. 살아서 한 번 헤어지니, 죽어서도 같이 묻힐 수가 없고, 고단하게 살았던 늙은 육신이 묻힐 땅 한 뙈기가 없어 사돈댁 선산  귀퉁이에 묻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1698년(숙종 24)에야 단종이 복위되면서 능호가 제정되었는데, 한평생 단종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하여 능호에 생각 사(思)를 넣은 것이다.      


  15세에 14세 단종의 배필인 왕비가 되어, 18세에 단종과 헤어져, 평생 죽은 단종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아간 가련한 여인이 정순왕후 송씨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문종의 상중이라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하는데도, 종친들을 대거 동원하여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이 살해를 당했고, 어린 임금인 단종은 더 이상 국혼을 미룰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계유정난의 피바람이 불어치는 와중에 간택령이 내렸고, 여덟 번의 간택 끝에 왕비가 결정되었는데, 바로 평범한 선비 송현수의 딸이었다. 송현수는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 기뻐하기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한다. 딸이 왕비가 되면 왕비를 배출한 집안은 당연히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해서 불안했을 것이다.      

 

  왕비가 되어 입궐하게 된 정순왕후는 궁궐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왕은 수양대군과 그 일파에게서 물러나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고, 언제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점점 종친들까지 나서서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라고 압박하였다. 생모 대신 키워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는 출궁되었고, 금성대군은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내시들과 궁녀들도 걸핏하면 축출되어 수양대군쪽 사람들로 채워졌다. 세종과 문종의 후궁들, 대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노상궁들이 수양대군 일파가 권력을 장악한 이상 양위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귀띔을 했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안전하다면 임금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불안에 떨며 우는 단종에게 양위할 것을 권하였다.      

  

  양위를 가장한 찬탈임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어느 시대나 의로운 이는 있는 법. 울분강개한 이들이 단종복위운동을 펼쳤으나 실패하였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보상을 노린 이들이 앞다퉈 고변하여, 칼자루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이름만 거창한 ‘단종복위운동’이 되고 말았다.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들이 가혹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였고,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길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역모로 몰려 유배 가게 되면 다음 수순은 사약이다. 아마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는 후회하였을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운명이라면 제대로, 임금답게 저항할 것을 하고. 그랬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한날한시에 죽을 수는 있지 않았을까.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지 3개월 후에 정순왕후 송씨의 친정아버지 송현수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송현수는 교수형을 당했다. 역사는 송현수의 역모사건은 실체가 없는 조작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는 폐서인이 되어 동대문 밖에 있는 여승들의 암자 정업원으로 쫓겨났다. 이때 신숙주가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세조에게 청을 올렸다고 한다. 역모로 몰린 대신들의 아내나 딸이 공신의 집으로 첩이나 노비로 보내지던 시대이기는 했으나,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학사 출신의 신숙주가 세종의 적장손의 배필을 그런 식으로 대한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오백 년 전 사건이라 해도 화가 났다. 나는 신숙주가 정순왕후 송씨를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말을 꺼냈다.  

  “세종 임금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집현전 학사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는, 그 신숙주?”

  “맞습니다. 그 신숙주.”

  “참,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아무리 폐서인이 되었다 해도 정순왕후를 자기집 노비로 달라고 한 것은 너무 나갔다.”

  “그래서 세조도 거절한 것이겠지요. 왕실에 대한 능욕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신숙주는 그 일로 두고두고 사가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해요.”

  “세종이 총애하여 자기 다음 보위에 오를 문종과 단종을 잘 보필하기를 바랐던 신숙주는 어찌하여 배신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단종의 즉위를 명나라에 알리는 임무를 맡게 된 수양대군이 자기를 보좌할 사람으로 신숙주를 점찍었다고 해요. 명나라에 다녀오는 동안 동갑내기 수양대군과 죽이 잘 맞아 절친이 되었다고 합니다.”

  “단종 이후 사람들은 변하기 쉬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바꿔 불렀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숙주에게 분노한 거겠죠.”     

 

 단종 장릉에서 옮겨다 심은 소나무 (앞에 조그만 표지석이 있는 나무) 


  우리는 사릉을 떠나기 전에 영월에 있는 단종 장릉에서 옮겨와 심었다는 소나무를 찾아보기로 했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인 이 부부의 사연을 안다면 천장해서 같이 묻어주면 좋은데, 이제 조선왕조 왕릉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전 10화 역사탐방에세이 20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