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하지 않은 손님
땅콩을 여섯 줄 심었는데, 아직까지는 잘 자라고 있다. 내가 ‘아직까지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확철에 나타나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 때문이다. 그 손님은 땅콩이 다 자란 것을 나보다 먼저 안다. 첫해는 길가 밭이고, 여기는 내 영역이오, 하는 경계를 표시하는 그 어떤 담이나 동물방지망도 설치하지 않아서, 지나가던 누군가가 손을 댔나, 짐작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달랑 한 줄을 심은 터라 억울하지도 않아 잘 살펴보지도 않았다. 마침 그날 밭에 고구마를 캐러 온 사람들에게 한 포기씩 뽑아 안겼더니 좋아했다.
다음 해는 땅콩을 세 줄 정도 심었다. 그런데 첫해보다 피해가 심했다. 2년 차에는 고추밭에 고라니가 습격해 예초기로 베어낸 것처럼 고춧대를 끊어 먹어버리는 바람에 부랴부랴 동물방지망을 빙 둘러쳤기에, ‘누군가 일부러 작정하고 넘어오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땅콩 줄기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해코지하고 간 게 눈에 보였다. 사람 엉덩이가 앉았던 자리 같기도 한데, 사람이라면 땅콩 줄기째 잡아당겨야 하는데, 줄기는 그대로 있었다. 땅콩 줄기를 잡아당겼더니, “에게게, 이게 뭐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줄기에 매달린 땅콩 수가 적었다. 줄기를 놔두고 땅 밑을 공략한 것이다. 흩뿌려져 있는 땅콩 겉껍질이며, 먹다가 뱉은 것 같은 으깨진 땅콩들 하며, 아무래도 들짐승이 왔다 간 게 분명해 보였다.
체리 할아버지가 오셨길래, 땅콩밭에 누가 왔다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응, 그거 너구리 짓이야.”
“너구리요?”
“그래, 조금이라도 건지려면 얼른 수확해. 아마 오늘 밤 지나면 건질 게 없어. 그놈들이 알았으니, 결딴내려 올 거야.”
“아니, 지들이 뭐 한 게 있다고 결딴을 내려 와요?”
“그건 너구리 맘이지. 아무튼 빨리 뽑기나 해.”
“아직 더 키워야 하는데…….”
“그냥 캐. 그러다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체리 할아버지가 주의를 주었음에도 설마 하룻밤 사이에 다 먹어치우기야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다음날로 땅콩 수확을 미루고, 고추 따는 일을 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체리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야말로 땅콩 심은 이랑이 초토화되었다. 부랴부랴 수확하고 있는데, 체리 할아버지가 왔다.
“건질 게 별로 없지?”
“네, 그러네요.”
“그러게, 내가 어제 얼른 캐라고 했잖아.”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먹을 줄 몰랐어요.”
“걔들은 떼로 몰려다녀. 그러니 하룻밤 새에 결딴이 나는 거지. 아무튼 남 좋은 일 시켰구만. 이것도 공부야, 공부, 허허허.”
결국 땅콩은 1년 차 한 줄 농사보다 2년 차 세 줄 수확량이 더 적었다. 해서 여러 사람에게 나눠 줄 생각도 못했다. 우리 좀 먹고 씨앗용으로 좀 남기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3년 차인 작년에는 다섯 줄을 심었는데, 남편이, 너구리 밥이 될 텐데 많이 심는다고 하면서, 별로 먹지도 않으면서 왜 땅콩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며 궁시렁대었다. 자기는 고구마를 좋아해서 고구마를 많이 심는 거지만, 나는 땅콩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굳이 땅콩을 심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남편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남편 눈치가 보여 끽소리도 못하고 혼자서 다섯 줄을 다 심었다. 마치 데려온 자식 눈칫밥 먹이는 꼴이었다.
2년 차 경험 때문에 너구리가 왔다갔다는 것을 안 순간, 고추 따는 일을 멈추고, 부랴부랴 수확했다. 문제는 수확량이 제법, 꽤 되었다는 것이다. 적으면 적어서 문제, 많으면 많아서 문제였다. 그때는 고추 따는 일 때문에 농막에서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어서, 누군가에게 땅콩을 나눠주기도 쉽지 않았다. 남편은 고추 따기에도 정신없는데, 팔지도 못할 땅콩을 많이 심었다고 또 궁시렁대었다. 남편의 궁시렁대는 소리를 듣자니, 차라리
땅콩 수확을 너구리에게 양보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밭 가까운 곳에 농산물 판매대가 있어서 음료수를 들고 찾아갔다. 혹시나 땅콩을 팔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평소에 오고 가면서 보면 네다섯 분이 각자의 칸막이 앞에 앉아 계셨는데, 그날은 한 분만 나와 계셨다. 사정 이야기를 했다. 원래 좀 나눠 먹으려고 심었는데, 생각보다 수확량이 좀 나왔고, 지금 고추 따는 철이라 나눠 주려 갈 수도 없다, 싸게 넘길 테니 팔아 보시지 않겠느냐.
어르신이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그 판매대는 문중에서 만든 것으로, 여기는 왕씨 며느리 여섯 명이 장사하고 있으며, 각자 집에서 짓는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는데, 한 집에서 땅콩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다. 어르신이 딱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집에서 지은 거라며 배 두 개를 기어이 내 손에 쥐여 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뒤에서 혹시 로컬푸드면 모를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컬푸드 참여 농가 교육을 받고도 거기에 땅콩을 출하할 생각을 못 했는데, 어르신의 말 한마디가 남편의 궁시렁대는 소리에서부터 나를 구제해 주었다.
땅콩은 로컬푸드에 내놓기 무섭게 다 팔려나갔다.
“와, 풋땅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땅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놀라워했다.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풋땅콩을 좋아하는 게 너구리만이 아니라서, 세상 사람의 입맛이 하나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땅콩을 심으며 남편과 있었던 에피소드를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친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언니가 반색하며 말했다.
“너, 기억 안 나니? 우리 할아버지 땅콩 농사 엄청 지었잖아.”
“정말? 나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하긴, 그때 너는 아주 어렸으니까. 그래도 너 기억에 그 땅콩 냄새가 남아있었나 보다. 그러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땅콩을 심겠다고 우겼지.”
정말 그랬나? 정말 그 냄새가 내 기억 저장소 어딘가에 머물러 있어서 남편이 반대하는 데도 땅콩을 심겠다고 우겼던 것일까? 그렇다면 조부모님과 나는 땅콩으로 이어져 있었구나. 코끝이 찡했다. 추억은 냄새를 타고 온다고 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