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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Aug 24. 2021

등린이 한라산 오르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가요. TT

등린이 한라산 오르다          


생에 산에 오른 경험이라고는 동네 뒷산 두 번이 전부였던 내가 무슨 자신감인지 한라산 등반을 호기롭게 도전했다랜선으로 블로그의 한라산 등반기를 쓱 눈으로 읽고는 완만한 능선이 단지 길게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도전한 그야말로 무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코로나로 인한 실내 생활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도 고려하지 않았고 어느덧 마흔 초중반에 접어든 내 나이도 고려하지 않았다그렇다고 한라산을 오르기 전 꾸준히 체력 관리를 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나조차도 그 당시 내가 무슨 생각으로 한라산 등반을 결심했는지 알 수가 없다나는 그저 한라산을 꼭대기까지 등반하면 주는 인증서’ 그게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산이라면 질색을 하고 힐링은 무조건 바다!’라며 ’ 파와 바다’ 파를 가르며 논할 때마다 바다 파를 외치던 나였다여하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모험하는 나는 그렇기에 가끔 뜻하지 않는 곤경에 처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번 한라산 등반이 그랬다.     


일단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날씨가 그러했냐 하면 그렇지 않다외려 날씨는 일 년 중 백록담을 아름답게 관망할 수 있는일 년을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는 그런 기가 막히게 좋은 날 중 하나였다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이 어떠한 필터의 거침도 없이 맑게 그대로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문제는 내가 아침잠이 많다는 것과 그로 인해 아침 컨디션 아니 새벽의 컨디션은 극도로 좋지 않다는 것부터 시작했다아침잠이 많은 이들은 밤에 늦게 자는 부엉이파이다밤에 머리가 잘 돌고 할 일이 많으니 밤에 늦게 자고 따라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고역이다잠이 많다기보다는 늦게 잠드니 수면시간은 예닐곱 시간이 채 안 되기 일쑤인데아침에 좀 자야 그 수면시간을 채우는 것이다두세 시 넘어 자는 날이 많기에 학령기 아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오전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다섯 시간 자는 날도 부지기수다그렇기에 부족한 잠은 커피로 물리치니 아침 카페인이 무조건 필수인 모닝커피 중독이다깨자마자 한 잔아이가 학교 간 뒤 아홉 시는 돼서 두 번째 커피를 마셔야 그나마 하루를 시작하는 저질 아침 컨디션인 게다이 컨디션이 한라산 등반을 방해하는 일등 요소가 될 줄이야.     


한라산은 1950 m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등반의 험난함은 둘째치고 등반 길이 매우 길다는 뜻이며 그것은 완등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의미이다그렇기에 한라산 등반은 대부분 새벽에 시작한다여름은 덥지만 다행히 해가 길다그래도 초보자인 등산객들은 꼬박 왕복 8~9시간을 예상해야 한다하여 새벽 6시 적어도 7시에는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해야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하고 해가 지기 전 내려올 수 있다.


아침 6, 7시에 등산로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게는 꼭두새벽인 5시 반에는 일어나야 밥 먹고 준비하고 이동할 수 있었다간단한 아침 식사 후 비몽사몽간에 이것저것 챙기느라 커피를 마실 여유조차 안될 만큼 촉박한 시간이었다. 6시 40분경 등산로 초입에 들어설 때까지도 잠이 깨는 둥 마는 둥 했다.     

제주 곶자왈 숲만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산로가 시작되었다초입이라 그런지 산책길같이 완만했고 쉬운 길이 이어졌다그곳에 뿌옇게 낀 새벽안개처럼 잠이 덜 깬 내 정신도 흐릿했다첫 번째 휴게소인 속 밭 휴게소까지 오를 즈음 해가 뜨고 날이 밝아지며 더워지기 시작했다머리가 좀 띵하고 약간의 두통이 시작되었지만 아침 컨디션이 원래 안 좋아서 그렇겠거니 했다타이레놀이라도 갖고 왔는지 가방을 뒤적였으나 챙기지 않았더랬다컨디션 탓이겠지 하고 오르는 산행은 점점 고되어갔다.   

  

속 밭 휴게소 이후에는 끝도 없이 돌길과 계단이 이어졌다그 와중에 운동화를 신고도 거북이 같은 나를 제치고 빠르게 오르는 이십 대의 젊음이 어찌나 부럽던지 말이다첫 번째 휴게소까지는 그저 산책길 같았구나 느껴질 만큼 두 번째 휴게소인 진달래 휴게소까지는 너무나 길고 힘든 코스였다걷는 내내 두통으로 어깨 목까지 뻐근하고 눈앞이 자주 흐려지곤 했다카페인 부족으로 인한 두통 같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체력 부족으로 인해 더위도 먹었던 것 같다.     

컨디션 난조로 진달래 휴게소까지도 겨우 올랐는데 아들 녀석이 생각보다 씩씩하게 오르는 데다가 두 번째 휴게소까지 왔는데 여기서는 백록담이 얼마 남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애매한 그곳에서 다시 걸어 올랐다나 자신과의 싸움이 이어졌다계속 쉬다 걷다를 반복했다랜선으로 보던 완만한 등선은 당최 어디에 있는 것인지오르고 또 올라도 100m씩 그야말로 조금씩 전진이었다. 1600 m, 1700 m, 포기할 수가 없는 마지막 지점이 근처였다이 지점 어딘가에서부터 두통이 심해지고 눈앞이 몇 번 흐려질 만큼 힘들어서 같이 찍은 사진에는 눈의 초점이 흐릿하다아들이 생선 눈 같다고 놀렸지만 뭐라고 할 기운조차 없었다게다가 백록담을 향하는 마지막은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 길이었다경치가 좋다며 다들 환호했지만 주변을 볼 여력조차 없었다두통을 참으며 걸었더니 몸 상태가 정말 너무 안 좋았다정상에 도착하니 바람은 불었지만 날이 정말 깨끗하다 싶을 만큼 맑았다다들 정상 인증 사진을 찍느라 줄을 길게 섰고 나는 남편을 그 줄에 세워둔 채 잠시 쉬었다백록담을 볼 기운조차 없었다팔팔한 아들 녀석은 백록담을 구경하고 인증샷을 찍기 바빴다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그 귀한 백록담을 구경조차 못하고 정상 인증 줄을 선 남편이 안 되어서 교대를 해주어야겠다 싶었다아들 녀석 곁에 가서 백록담을 슬쩍 보았다화보 사진에서나 보던 멋진 풍경이었다힘이 하나도 없는데도 풍경이 대단했다는 기억이 남는다사진 몇 장을 찍고 남편이 백록담을 보도록 줄을 교대해 주었다



한 시간 남짓 기다린 후 정상 사진을 찍고 삼각 김밥 하나로 점심을 먹은 후 오후 2시 전에 내려가라는 직원 성화에 하산을 시작했다하산하는 길에 보니 좀 쉬어서인지 스위스 알프스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을 가고 싶었는데 정상에는 없어서 볼일을 보려면 진달래 휴게소까지 내려가야 했다그래서 물을 많이 마실 수가 없었다정상 쪽은 험한 바윗길이라 올라갈 때도 여간 고생이 아니었는데 내려갈 길이 까마득했다올라오면서 이미 좋지 않은 컨디션과 두통과 싸우며 올랐기에 자신과의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겠구나 싶었다올라온 길을 알기에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길고 길지 예상되어 무모한 산행이 그야말로 후회막심이었다등산 초보에 산을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였다정상에서 내려가는 바윗길이 너무 험해서 나름 조심하여 집중했지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 왼쪽 발목은 꺾여 아프기 시작했다앞서가던 남편이 돌아보고 비상용으로 가져간 붕대를 칭칭 발목에 동여매 주었다발목까지 오는 등산화를 새로 사는 건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늦었다한라산을 동네 뒷산 오르는 듯 쉽게 생각하고 뒷산에 오르던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온 탓을 했지만 이미 늦은 걸 어쩌랴하필 발목을 정상 부근에서 삔 탓에 가뜩이나 컨디션 안 좋았던 나는 아픈 발목을 절뚝이며 하산해야 했다대를 동여맸어도 임시방편일 뿐 절뚝거리며 이 긴 산행길을 걸어 내려갈 생각에 아득해졌다.  

   

'119를 부를까.'

고백하건대 올라갈 때는 눈앞이 깜깜해지고 힘들어도 버텼는데 내려가는 길발목을 삔 시점부터는 119에 전화하고 싶은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다그야말로 체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자신을 붙잡아야 하는 정신력과의 싸움이었다등산로 초입에서 교육받을 때 심장발작 같은 거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는 당부가 아니었으면 전화했을지도 모른다그깟 인증서 뭐라고 119 부르면 인증서 못 받을 거 같아서또 하산 제대로 안 하고 받기에는 자존심 상해서 참고 견디었다진달래 휴게소까지 어기적어기적 내려와 문득 생각나서 먹은 초콜릿 카페인 덕분인지 두통은 다행히 가라앉았다화장실도 있어서 스포츠음료도 벌컥 마시니 힘이 조금 났다그 와중에 레일을 타고 내려가는 가족이 얼마나 부럽던지, '나도 태워주세요외치고 싶었다.     


그나저나 다친 발목 때문에 끝없는 돌길이 낭패였다평평한 길은 발목이 그나마 버티어 줬는데 돌길에서는 발을 디딜 때마다 아파왔다그러다 보니 땀방울이 구슬처럼 맺혀 떨어질 정도로 잠시도 쉬지 않고 걸었지만 남들에 비해 두 세배 느려졌고 느린 내 걸음에 맞춰야 하는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많은 사람들이 우릴 지나쳐갔다이제 거의 우리가 마지막이었다산에 그 많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정상에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다들 해지기 전에 내려가기 위해 바삐 걸어 내려갔다나 때문에 빨리 내려가지 못하고 속도를 맞춰준 가족들에게 속으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벌써 내려가서 쉬고 있었을 텐데 내가 민폐가 되어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만 같아서다남편에게 먼저 내려가서 차를 미리 대기시켜 달라고 했다날다람쥐처럼 내려가는 남편 뒷모습을 보며 더 미안했다그리고 아들과 나는 숲에 덩그러니 남았다.     


아들은 아빠가 먼저 내려가자 마음이 바빠졌는지 아니면 갑자기 두려워졌는지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하더니 나보고 빨리 걸어야 한다고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돌길은 최선을 다해도 한계가 있었기에 쉬지 않고 걸었지만 느렸다사람 없는 숲이 나 또한 점점 무서운 데다가 무엇보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게 문제였다속 밭 휴게소까지 평평한 데크 길은 속보로 쉬지 않고 걸었다휴게소에서도 잠시도 쉬지 못했다화장실만 들린 다음 내려가야 했다우리의 빨라진 발걸음만큼이나 뉘엿뉘엿 해가 지는 속도가 빨라졌다다행히 아들의 독촉 때문에 앞에 외국인 커플이 보였다얼마 만에 만나는 사람인지그제야 안심이 되어 그들과 속도를 맞추려고 애썼다돌 길은 아픈 발목으로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산 노루도 보았으나 외국인 커플이 신기해하며 사진 찍는 사이에도 나는 부지런히 걷기만 해야 했다그래야 그들을 따라잡아 내려갈 수가 있었다간간이 나타나는 짚 길이 그나마 속도를 내게 해주었다저 멀리 남편이 나타났다기다린 거냐고 물으니 등산로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해가 지기 시작하는 걸 보고 우리를 놓고서는 도저히 불안해서 차를 가지러 갈 수가 없어 도로 올라왔단다돌길을 뛰어 올라와서 지쳐 보였지만 남편을 보니 반갑고 고맙고 든든했다.     


한여름이라 8시에 지던 해가 산이라 빨리 지는지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깜깜해지기 전에 내려가려고 부지런히 정말 죽을힘을 다해 걸었다등산로 초입에 가까스로 다다르니 저녁 7시 40분이었다어둠이 산을 잠식해갈 무렵 드디어 등산로 끝 주차장과 불빛이 보였다.

내려오자마자 주저앉고 싶었으나 직원들의 배려로 인증서를 받고 뒤를 돌아보았다산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였다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아무리 내가 강심장이라지만 어둠이 내린 컴컴한 산은 무서웠다택시에 올라타 제주도 운전기사에게 제주도 사람도 한라산 정상에 안 가본 사람이 많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서울에 살면서 남산타워 안 가본 사람 많은 거랑 같은 이치인가 생각했다제주도에서는 늘 상 보이는 게 한라산이기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 아닐까서울의 남산타워도 늘 보면서 언제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기에 정작 서울에 오래 산 어떤 이는 한 번도 안 가본 것처럼 말이다.     


숙소 근처 돼지구이집에서 긴 등산 끝 배고픔을 달래며 회포를 풀어야겠다는 아들과 남편의 성화에 당장 쓰러져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은 피곤함을 무릅쓰고 결국 고깃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나 때문에 길고 늦어진 산행이었기에 미안함 때문에라도 갈 수밖에 없었다그들만 올랐으면 8시간 정도면 가뿐히 내려왔을 것이다생각보다 아들의 체력이 단단했다젊기 때문인가 하고 스무 살에 한라산도 오르지 않고 뭐 했는고 후회를 잠시 했다산을 그토록 싫어했던 내가 제주도로 온 고등학교 졸업여행에서 한라산 등반을 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기껏 속 밭 휴게소까지였는데도 올라갈 생각도 없었다다시 돌아가도 스무 살의 나는 오르지 않았을 것 같다어떠한 연유로 마흔 중반의 내가 한라산 등반을 해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올 한 해가 반 밖에 지나지도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시련이 많았던 탓에 정신이 나갔었는지도 모르겠다어쩌면 단순하고 쉽게 생각했기에 멋모르고 도전해서 한라산 완등을 이루어냈는지도 모르겠다랜선으로 산 구경하고 동네 뒷산의 긴 산행 버전이라고 생각한 내 무지 탓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는데 인생에 한라산 등반이라는 버킷리스트를 이루어내었다물론 가족의 도움이 너무나도 컸다아들의 독촉이 아니었다면 해가 진 깜깜한 산길을 울며 내려오거나 포기하고 119를 불렀을지도 모르고 남편이 아니었으면 정상에서 나간 발목을 부여잡고 119에 전화했을 거다.

한라산 등반은 나의 정신력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한 극기 훈련과도 같은 13시간의 산행이었다다녀와서 내게 강인한 정신력이나 체력이 생긴 것도 아니다다친 발목 때문에 깁스를 한 달이나 해야 했고 아직도 다 낫지를 않았다하지만 너무 나이 들기 전 인생에 한 번쯤은 한라산 백록담을 보고 왔으면 하고 조심스레 권해본다가족들과 함께 한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종이 쪼가리일 뿐인 그깟 인증서는 덤이다아마 앞으로 13시간 동안 온 가족이 고된 산행을 할 날이 또 오지 않을 것 같다아마 내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한라산 산행이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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