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 나는 꼼꼼한 듯 안 꼼꼼한 스타일이다. 여행 갈 때 나의 짐은 간단한 편이다. 옷가지, 화장품 몇 개, 세면도구가 끝이다. 혼자 갈 때는 짐이 더 단출하다. 옆지기가 보기와 다르게 털털하다며 남자 같단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이 아니니 집도 보기에만 어느 정도 깔끔히 해놓고 산다. 어쩌다 정리. 수건도 각 잡는 일은 없다. 가사에 시간 많이 들이는 게 참 부질없다 생각해서 적당히 한다. 식기세척기나 세탁기 등 기계들이 돌아갈 때 그래서 행복하다. 기계가 대신 가사를 해주고 나는 시간이 생기니까 그것 자체로 좋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려니 요리도 빠른 편이고 에어프라이어와 오븐과 인덕션이 나를 바삐 돕는다.
이렇게 가사를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하려다 보니 낡은 아파트의 두꺼비집이 내려간 적도 있다. 세탁기, 전기밥솥, 인덕션, 오븐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돌리다가 사달이 났던 거다.
그런 내가 짐이라고 싸면 얼마나 게으르게 대충 싸겠는가. 누워서 핸드폰 메모장에 싸야 할 품목을 쭉 적는다. 그런 후 품목을 가져다 놓고 여행가방에 대충 돌돌 말아 넣는다. 어차피 꺼낼 거 구겨지지만 않으면 되고 예쁘고 편한 원피스나 몇 벌 있으면 된다. 그런데 istp 옆지기가 이런 것을 못 본다. 그는 모든 옷은 각 잡아 개어야 한다. 위치도 정해져 있어야 한다. 각각 따로 담을 파우치까지 여러 개 샀다. 굳이 본인이 정리하고 싶다 하고 어차피 짐 싸는 게 귀찮은 나는 잘 됐다 싶어 내버려 둔다. 깔끔하게 양보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나에게 잔소리하며 시키면 싸우겠지만 스스로 짐을 싸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하등 없다. 정리 파우치까지 살 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웃었다. 내 돈 들어가는 일도 아닌데 어떠냐 싶으면서도 돈 써가며까지 정리를 열심히 하는 옆지기가 참 신기할 따름이다. 가방을 싸면서 여행 가는 것에 대한 설렘을 느끼는 건지 원...
각 잡아가며 짐 정리하는 옆지기에 비해 게으름의 극치처럼 보이는 enfp 아내는 누워서 손이 바쁘다. 숙소 예약하고 여행지의 유명한 밥집도 기웃거리고 관광지도 살펴본다.
막상 여행지에 가면 뭐가 유명하다. 어디 밥집이 괜찮고 어떤 음식은 맛보라고 하더라.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하고 가이드가 되어준다. 사진도 열심히 찍어준다.
e 성향인 나는 바깥에 나오면 신이 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것도 많다.
i 성향의 옆지기는 숙소에서 뒹굴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느지막이 조식을 먹고 좋은 숙소 안에서 TV 보고 수영하고 쉬는 게 행복한 스타일이다.
나는 적당히 나가서 걷고 체험하고 보고 듣는 여행을 선호하는 반면 옆지기는 휴양지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여행을 선호한다.
신혼여행으로 간 몰디브에서 둘이 얼마나 다르던지. 몰디브는 사진처럼 멋진 아니 사진보다 더 멋진 휴양지이다. 풀빌라의 고급 숙소는 너무 좋았고 태양과 바다 빛은 잊지 못할 파라다이스 자체였다. 나는 낮에 스노클링도 하고 낚시 등 다른 액티비티 한 개를 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그곳이 점점 따분해졌다. 리조트 안 밖을 저녁마다 돌아다니다가 유럽을 다시 갈 걸 하고 후회를 했다. 섬 하나가 리조트 하나이니 돌아다녀봤자 별 다른 게 없었다. 반면 옆지기는 휴양을 원했기에 먹고 자고 수영하고 또 먹고 자고 수영하는 몰디브가 너무 좋다고 했다.
이렇게 다른 여행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도 잘 놀러 다닌다. 한두 군데 관광하고 숙소에서 놀며 편히 쉬는 시간도 갖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짐 싸는 것도 옆지기의 일이다. 체크아웃 시간 끝까지 놀려는 나와는 달리 그는 짐을 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충 빨랫감만 분류하고 싸면 될 거 같은데 다시 풀 짐을 또 정성껏 싼다. 빠른 시간 내에 준비를 끝 낸 나는 군대 갔으면 사랑받았을 거라고 놀리는 옆지기의 짐 싸기를 기다리며 빠뜨린 것은 없는지 룸 체크를 한다.
반대되는 성향이 이렇게 많은데 크게 싸우지 않는 걸 보면 서로의 장점은 인정해주고 단점은 잘 보완하는 어쩌면 꿍짝이 잘 맞는 여행 동지인 셈이다. 그래서 이렇게나 오랫동안 함께 인생의 항해도 잘해오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