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의 힐링 장소는 동네의 작은 서점이었다. 동아 전과와 표준 전과를 펴내던 두 출판사가 경쟁하던 시절이었다. 서점에서 전과를 펼쳐놓고 요목조목 비교하기도 하고 이달 학습, 다달 학습 등의 문제집도 열심히 골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점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은 인쇄된 종이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유리로 된 서점 문을 열면 종이 울렸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나던 새 책 냄새가 무엇보다도 좋았다. 지금 책들은 어찌 된 일인지 책 냄새가 잘 나지 않는다. 종이 질이 고급화되고 인쇄 기술이 발달해서인지 아니면 냄새가 나지 않는 잉크가 나온 것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가끔 잡지책이나 문제집 판매대를 기웃거리면 여전히 그 냄새가 날 때가 있다. 갓 인쇄되어 나온 듯한책 내음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동네서점에 들어선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딱 하나뿐인 작은 서점이 있었다. 서점 가는 것에 맛 들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서점에 자주 기웃거렸다. 새마을금고 맞은편에 있던 서점에는 매달 잡지책이 새로 들어왔다. 나는 책 살 돈을 아끼고자 선 채로 잡지 한 권을 다 훑고 나오기도 하고 눈에 띄는 신간 도서를 그 자리에서 읽고 나오기도 했다. 학생이어서신학기마다 자습서나 문제집을 과목별로 구매했으니 나름 큰 고객이었겠지하고 미안한 마음을 덜어 보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주 가서 책은 사지 않고 책만 읽다 나왔으니 미울 법도 한데 서점 아저씨는 눈치를 주거나꾸짖은 적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눈치를 보며 책을 읽고 나오곤 했다. 요즘처럼 동네마다 도서관이 들어서 있지도 않았다. 반마다 학급문고라 하여 집에 있는 책들을 한 권씩 가져오라 해서 꽂아놓은 책꽂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책들은 이미 다 읽었고, 학생이라 용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회수권을 사서 버스를 오가며 타야 했고 친구들과 가끔 아이스크림도 사 먹어야 했다. 나는 서점에서 허리를 잔뜩 굽히고 다리는 '시옷' 자로 선 어정쩡한 자세로 책을 읽다가 가끔 펭귄 문고 책을 사 들고 왔다. 지금은 노안으로 보이지도 않을 작은 글씨가 쓰인 손바닥만 한 펭귄 문고 책은 아주 저렴했다.
이사를 오고 난 후 역 주변에 대형 서점이 생겼다. 나는 그곳에도 책을 읽으러 많이 갔다. 학교 도서관도 있었고 지역 도서관도 있었지만 새 책 냄새를 맡으러 가면 너무나 좋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읽다가 힘들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읽기도 했다.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엄마와 다툼이 있어도 갔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갔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잡념이 사라지곤 했다. 심지어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모집하자 지원해서 일하기도 했다. 종일 서점에서 일하는 것은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낭만적인 일은 아니었다. 임시 아르바이트여서 몇 개월 일하고 그만두었다. 직원들을 모두 알게 된 나는 그 서점에 책을 편히 읽으러 갈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고객으로만 있을 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돈을 벌고 난 후 나는 내게 주는 선물로 문화비를 책정해서 매달 책을 몇 권씩 샀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사 들고 가는 길은 절로 흥이 났다.
아이를 낳고도 나는 유모차를 끌고 서점 나들이를 많이 했다. 그 덕분에 아이도 책 읽기를 좋아했다. 나는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을 수 있는 서점을 즐기듯이 갔다. 아이와 마땅히 갈 곳이 없을 때 서점은 꽤 훌륭한 실내 놀이터였다.
지금도 백화점이나 시내를 갈 적에는 서점에 들르곤 한다. 혼자 신간 코너를 둘러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책은 사 오기도 한다. 근래에는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일도 잦다. 하지만 직접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책 냄새를 맡으며 사는 것에 비할 바가 안 된다. 1~2년마다 책을 정리하는데 중고로 되파는 것도 일이다.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걸 하고 후회하곤 하면서도 또 책을 산다. 그저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인 것을 알지만 어쩌랴.
요즘 동네서점에 들르면 책보다는 수험생들을 위한 문제집이 더 많다. 신학기에는 그 문제집에서 나는 새 책 냄새가 온 사방에서 난다. 동네서점 문을 여니 종이 울린다. 꿈 많은 소녀였던 어린 내가 동네서점을 찾았을 때를 회상한다. 그때 서점 아저씨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 푸근했는지 차가웠는지기억이 도통 나지 않는다. 몰래 책을 읽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멋쩍어하며 재빨리 빠져나가곤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사거리 터줏대감처럼 자리하던 동네서점은 개발이 되면서 사라졌다.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동네서점들이 아쉽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나의 아지트와 같았던 서점, 그곳에서 몰래 책을 읽으며 키우던 꿈과 희망. 그런 것들이 그리워지는 나이가 된 것일까. 나에게 쉼표를 단 정거장 같던 곳이었다. 동네서점과 그곳을 지키던 아저씨를 어른이 되어추억하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어린 마음에 슬퍼도 힘들어도 달려가 책으로 위로를 받던 그 서점을 다시 기웃거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