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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Jun 15. 2024

 미술 선생님

사람 많은 곳을 혼자 정처 없이 걸어 다니던 이십 대 초반 시절이 있었다. 사람 많은 명동 거리를 걸었고 종로를 지나 인사동도 단골 코스였다. 혼자여도 사람 북적북적한 곳을 다니면 기분이 한결 나았다. 왠지 모를 외로움과 공허감이 온몸을 지배하는 듯했다.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자주 어울렸지만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꼭 사람 많은 거리를 찾았다. 어떤 날은 늦은 밤 동대문에 서 있었다. 시장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그때의 나는 이유를 몰랐지만 늘 삶과 동화되지 못하는 기분이었고 사람들 속에서 겉도는 느낌에  우울공허함에 시달렸다. 즐겁게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놀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는 극심한 허무와 외로움이 몰려왔다.

다시 혼자인 나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외로움을 덜 느끼는 장소가 있다. 아이러니하게 사람이 드문 미술관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미술 선생님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귀여운 웃음을 지닌 키가 작은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된 지 오래지 않아 아직 풋풋하고 언니처럼 느껴졌었다.

어느 주말, 선생님이 미술관 나들이를 제안했다. 나와 서넛 학생이 따라나섰다.

자주 가던 동물원 옆에 있었지만 미술관이란 곳은 그날 난생처음 갔다.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할 만큼 황홀했다. 백과사전이나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중앙 원형홀에 거대한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눈길을 끌었고 건물 내부 전체에서 물감냄새인지 특유의 냄새가 가득 났다.

권진규의 '지원의 얼굴' 같은 조각상과 김환기 작품들을 비롯 우리나라 유명한 작품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사진으로는 작게 보였던 작품의 커다란 크기, 유화 물감의 생생한 질감등이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적일 만큼 놀라웠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니! 너무 감명 깊어서 가족들을 설득해 다시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미술관 다니는 것을 그날 이후 너무 좋아했다. 선생님이 그림도 그려서 어느 갤러리에 우리를 초대해서 선생님 작품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추상화였다. 선생님이면서 화가였다. 나는 선생님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다.  단박에 갤러리까지 좋아하게 되었고 그림을 배워보고 싶어 미술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까지 다녔다. 소묘와 수채화를 배웠는데 미술에 그다지 재능이 있지는 않다고 느꼈지만 미술을 더 즐기고 좋아하게 되었다.


미술관은 혼자 가도 외롭지 않다.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와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거나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기발한 재치에 웃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감탄하기도 하고 엉뚱함에 놀란다.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에 시원해진다.

복잡한 세상에서 잠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것 같다.

하얀 도화지처럼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공간이동해서 꿈같은 세상을 유영하는 것 같다.

다리는 아픈데 각세포들이 하나하나 살아나 촉수를 세우는 것이 느껴지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다.  친한 지인과 같이 가기도 하지만 혼자 갈 때와 다르다. 지인과 갈 때는 느낌을 공유하고 다른 생각을 들어볼 수 있어서 좋고 혼자 가면 작가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 같아 작품 하나하나 깊이 들여다보거나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어 좋다.

복잡한 유명 전시회를 가기도 하지만 인적 드문 미술관이 더 좋다. 좋아하는 작품 여러 번 보아도 뭐라 하는 사람 없고 미술관 냄새가 커피 내음처럼 안정감과 행복을 준다.

내게 처음 미술관이라는 곳을 보여준 선생님, 가끔 그분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민경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선생님 덕분에 저는 외롭고 공허했던 젊은 시절 그래도 덜 외로웠어요.

미술관을 좋아하게 되면서 더 넓은 세계를 보았지요.

외국에 나가서도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심미안을 주셨지요.

감사해요. 저는 잘 살아가게 도와주는 스승님들을 제 인생에서 때때로 만났어요. 귀한 인연들이었지요. 외롭고 막막할 때마다 미술관에  가서 위로를 받았어요. 작가들의 고독함과 마주하면서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다시 채우곤 했지요.

선생님, 어린 시절의 저를 미술관 데려가 주어서 감사했어요. 그날이 제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바꾸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허허벌판에 서 있던 저를, 많은 인파 속에 홀로 있던 저를, 늘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었지만 허무했던 저를 외롭지 말라고 손잡아 주신 거예요. 삭막한 잿빛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알록달록한 컬러풀한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을까요. 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호의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세계 송두리째 바뀌는 힘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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