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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Nov 13. 2024

나는 다정함 속에서 쉼을 찾는다.

나무들이 분주한 봄, 여름을 지내고 '쉼'을 준비하며 잎을 떨구는 계절이 오면 다정한 이를 만나고 싶다.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따수운 차와 함께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내 힘듬에 고개를 끄덕여주면 나를 존중해 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참 고맙다. 존중은 사랑에서 나온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맞는 말을 해주기보다 그저 편을 들어주고 경청해 주는 편이 훨씬 나을 때가 있다. 내 마음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주고 인정해 주 힘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지극히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고 나면 그 어떤 충고나 조언도 이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중요한 이유이다. 이성적 사고를 하고 객관성을 잃지 말라고 하지만 주위 모든 세상이 나에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다. 내가 엄마나 배우자, 지인에게 듣고 싶은 말이 그런 객관적인 평가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다정한 말인가 생각해 보면 어떨까.

 "엄마, 나 수학 시험 망쳤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이거 이렇게 풀라고 했잖아."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런 말은 학원 선생님한테 이미 들었을 거다. 또는 스스로가 '아, 이거 이렇게 풀어야 했는데 실수했네.' 하며 자책했을 거다. 객관적인 잣대는 이미 스스로에게도 엄청 들이대며 속상해하고 있는데 거기에 굳이 평가하고 결론까지 내려줄 필요까지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사회에서 비교당하고 평가받아 생채기 가득하고 선택되기 위해 충분히 애쓰고 있다. 어차피 문제 해결의 열쇠는 본인에게 있다. 해결책을 구할 때만 도와주는 게 맞다. 내게 힘듦을 토로하는 이유는 내가 편한 사람이라 내게 기대러 온 거다. 그저 기댈 수 있게 넉넉한 품만 줘도 되는 것을 해결해주려고 하다 되려 미움받기 쉽다.

"에구에구 우리 귀염둥이, 열심히 공부했는데 속상하겠네. 맛있는 간식 먹고 힘내자. 열심히 했으니 다음에 더 좋아질 거야. "라고 궁둥이 팍팍 두들겨주며 마라탕에 탕후루나 먹자고 손잡고 나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어느 TV프로그램에서 주름이 신경 쓰이는 아내에게 "늙어서 그렇지, 뭐"라고 말해주는 것보다 "당신은 여전히 내 눈에 예뻐."라고 말해주면 가정의 평화가 온다고 했다. 늙어가는 아내도 안다. 더 이상 자신이 이십 대처럼 예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속상한데 사실을 확인시킬 필요는 없다. 그저 아줌마, 할머니가 되어가는 나 자신이 속상하다고 말한 것이다. 거울에서 주름 살을 마주한 본인이 현실을 더 잘 알고 있다. 설마 모른다고 생각해서 알려 주는 것일까.

  맞는 말인데, 팩트를 말한 건데, 너 잘 되라고 말한 건데 억울하다 한다면 요지는 사실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따뜻하고 다정했느냐다. 마음을 나누고 싶지 사실 확인 내지 책에나 쓰여있는 해결책을 알려달라한 적이 없다. 합리적이고 이성적 조언을 해주는 것보다 '슬펐겠네. 화가 났구나. 힘들었구나. 아팠겠네.'라고 말해주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 이유는 뭘까.

어느 날 이성적 조언만 가득한 말을 들으며 화가 부르르 났었다. 나의 마음을 단지 인정만 해주어도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아는데 마음이 그렇지 않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날, 참아야 되는 거 아는 데 짜증이 나거나 분노가 이는데 화도 못 내서 마음 답답한 날이 있다.  공감이나 위로까지는 아니어도 '네가 화가 났구나, 기분이 나빴구나.' 하고 내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만을 바랐으나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잖아.'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심히 상심하였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누구든 한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다. 음을 헤아려 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음은 맞고 틀린 게 없다. 대가 하지 않는 언과 충고를 하다가는 자칫 멀어질 수 있다.

 그러기에 다정함은 쉽지 않고 다정한 이는 드물다. 날카로운 사물 같은 말들만 오고 간다. '많이 힘들었겠다.''얼마나 속상했니.'라는 한 마디에 아이스크림처럼 마음은 스르륵 녹여지는 것을.

사랑해야 남 다름 받아들여지고 존중하게 된다. 그러기에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정하다.

그래서 나는 다정한 사람이 좋다. 똑똑한 사람은 많은데 따뜻한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 말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너의 생각이 그렇구나, 너는 그런 마음이구나.'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너도 옳다.'까지 바라지 않는데도 그렇다.

점점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 비교 경쟁이 심해질수록 시기와 질투로 남을 까내리기 바쁘다. 그도 아니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자신을 보호하기에도 힘겨울 뿐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내게 다정했던 이들이 여태 마음에 남아 있다. 늘 따뜻하게 말해주었던 사람, 다정했던 사람, 친절했던 사람들이 남아 있다. 고2  야자시간에 딴짓한 것을 알면서도 학생주임에게 빼앗긴 물건을 웃으며 돌려주던 선생님, 내가 울 때마다 뒷주머니에 꽂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던 아빠, 시집살이로 힘들었던 내게 시를 들려주던 선생님... 내가 힘들 때 내 손을 잡아주던 많은 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벽을 짚고 나아가는 것 같은 날, 등불이 되어주던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고 따뜻했다. '레 미제라블' 속의 장발장에게 다정히 대해주던 신부님처럼 감사한 이들을 삶 속에서 이따금 만난다. 긴 인연이든 짧은 인연이든 말이다. 외국에서 초행길이라 길을 물었더니 찾는 곳을 직접 데려다주던 아이도 만났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는데도 밝은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다정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울컥한 적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인 줄 알 것이다. 괴롭고 속상할 때 '힘들지?'라고 말해주는 다정한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삶이 고단해 쏘아붙인 얼음장처럼 차디찬 말이 따뜻한 울림이 되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신조차 저버린 듯한 늪 같은 삶 속에서 지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이들은 다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나에게 다정한가.

나는 타인에게 다정한가.

삶의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환한 웃음으로 손을 잡아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또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다정함의 품에서 쉬고 싶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그러니 제일 먼저 스스로에게 다정하자. 혼자가 아닌 나로, 그리고 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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