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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Mar 23. 2024

그저 유쾌한 엄마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엄마와 거리두기 중입니다.

아침에 쓰레기를 정리하러 마당에 나갔다가 안 올 것 같던 봄이 성큼 다가 있다는 걸 느꼈다. 오늘은 어떤 핑계로든 외출해야겠다 싶어 진다. 그렇게 봄길을 걸어 가족을 끌고 점심 외식에 나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동네 어디에선가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누군가 마당에서 점심 바비큐라도 준비하는 모양이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에 가득 내려앉는다. 더 없는 봄이다.


나는 과거를 잘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몇 안 되게 기억하는 기분 좋은 장면들이 있다.

어린 시절 살던 곳은 밭농사를 주로 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선 굴다리를 지나거나 그 위의 철길을 걸어 넘어야 했는데, 철길 위에 올라서면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우리 집이 내려다 보였다.

봄이 되면 겨우내 말라있던 호박섶, 오이섶 등을 걷어 태우는 게 농사의 시작. 나는 그 냄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따뜻한 봄 햇살 아래 마른 섶이 타는 냄새는 성인이 된 후에도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 장면을 좋아했던 것은 단순히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연기는 나를 안심시켰다. 섶이 타고 있다는 건 아빠가 집에 있다는 것, (이런 일은 주로 아빠가 했다.)그러면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오늘은 조용한 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그 냄새는 나에게 안심을 주는 향이었던 거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나는 연기도 그랬다. 아빠가 아궁이 앞에 있구나. 안심이다 하고.


엄마는 삶을 늘 힘들어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한때는 엄마에 대한 기억들이 나를 괴롭히곤 했었다.

아빠와 엄마는 참 많이도 싸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오빠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가서 나오지 않았다. 그게 좀 얄밉기도 했지만,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다. 하루는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에 건넌방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는데, 방문이 열렸고, 그 앞에는 술 취한 아빠를 잡고 서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아빠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두 평이 될까 싶은 아주 작은 방이었다. 그 작은 방은 곧 싸우는 소리로 채워졌다.


나중에 엄마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았는데, 엄마는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듯 답했다.

"네가 있어야 내가 난리를 쳐도 아빠가 참고 있는다. 네가 없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어. 안 싸우고 그냥 넘기면 아빠는 더 자주 술을 마실 거야. 그러니까 싸울 때 옆에 있어라."

이 집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싸움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다행히 내가 집을 떠나게 되는 시기가 생각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다. 고등학교를 도시로 나가게 되면서 더 이상 집에서 생활할 수 없게 된 거다. 엄마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은 더 멀리 가리라 마음먹었고, 덕분에 나는 서울로 오게 되었다. 기숙사에 살게 되어 소식은 전화로만 종종 주고받았다.

다행인 것은 아빠도 건강 때문에 술을 줄였다는 거다. 나는 술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도 곧 알게 되었다. 엄마는 여전히 우울해했고, 그 이유는 넘치고 넘쳐났다. 전화를 하면 자신의 하소연을 하느라 나에 대해선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 듯 보였다.


엄마의 마음은 커다란 구멍을 가진 그릇 같았다. 스스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그래서 늘 공허한.

내가 힘겹게 구멍을 막아주면 잠시 차올랐다가, 나는 절대 행복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듯 또 다른 구멍을 내버리는 사람.


"엄마들이 다 그렇지, 네가 엄마가 되어봐야 나를 이해하지, 넌 어디 안 그러나 봐라."

엄마의 그 말은 맞지 않았다. 마로 살고 있는 지금도 그녀를 다 이해하진 못했으니까. 다만 한 시절을 고되게 살아온 여자를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를 원망하진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내게 엄마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엄마는 정말 잘못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된 삶이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텃밭을 일구어 먹는 정도의 농사가 아니었다. 세 명의 자식을 대학까지 가르치느라 어디 몸 아프지 않은 곳 없이 지었던 농사였으니까. 내 나름대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사립대학의 등록금까지 벌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자식을 가르치느라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 거다, 전화를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가.


나는 그저 사소한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고 싶었다. 서울 하늘 아래 등 붙이고 살 집이 있다는 걸 감사해했고, 만나야 할 친구가 있음에 감사해했다. 눈뜨는 순간부터 하루를 행복하게 여길 이유를 찾곤 그 이유를 되뇌며 지냈다. 난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어!라고.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한 날엔 내 옆엔 싸우는 누군가가 없음을 감사해했다. 나는 그 고요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분명 그렇게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했는데, 엄마와 통화를 하면 그 모든 이유들이 무색해졌다. 엄마는 불행한데 나는 행복하다는 게 죄책감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엄마를 위해 마음을 쓸수록 내 그릇에도 조금씩 구멍이 생겨났다.


그렇게 조금씩 병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부턴가 내일은 차라리 눈뜨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루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 대기 중인 차가 나를 덮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가 꽤 많이 우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곤 결심했다. 엄마와 거리를 두기로.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하게 되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직장 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나는 그녀와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결혼 했다. 결혼 후에도 엄마와 몇 번의 통화를 주고받았지만, 전화를 최대한 빨리 끊으려는 마음을 눈치챘는지 엄마도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와 조금 편안해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엄마는 약을 먹어야 할 만큼 다시 우울해져 있었다. 둘째를 낳고 힘든 육아로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던 내게 엄마는 여느 날처럼 전화를 해왔다. 왜 내가 다른 집 딸들처럼 살갑지 않은지, 다른 집 딸들처럼 자신을 챙기지 않는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백했다. 요즘 나는 우울하다고. 아이를 낳고 잠을 잘 자지 못해 힘들다고.

"네가 나처럼 농사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만 일을 하는데 뭐가 힘들어. 내가 너라면 아이 열도 키웠겠다. "하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나마 잡고 있던 엄마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엄마는 엄마가 제일 힘들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될 거라면, 후회를 택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연초에 아빠는 내게 엄마에게 왜 그렇게 냉정한 지 물었다.

나는 답했다. 엄마를 원망해서는 아니라고. 다만 나 스스로가 그저 유쾌한 엄마이고 싶다고. 그게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인 것 같다고 말이다. 한 번씩 아이들이 아플 땐 애를 태우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오늘'이라고 생각하며 지낸다. 그리고 엄마와의 거리 두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햇살이 따뜻한 것이, 그래서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한 하루다.

작지만 온전한 그릇 같은 마음을 품고 살고 싶다. 그리 강하지 않아서 수시로 보수해야겠지만, 조금의 감사로도 금세 채워지는 마음이면 좋겠다. 아이들도 강군도 아닌 그저 나로도 채워지는 마음.


매년 봄이 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듯 언제나 그 자리에 계절처럼 자리한 내가 되길 바라본다. 이왕이면 따뜻한 봄 같은 계절이길. 겨울이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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