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을 안고 튀어라 - 다카무라 가오루(노블마인) ●●●●●●●●◐○
날씨는 쾌청, 세기의 대도적이 오사카를 누빌 날이었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다면, 둘 다 싫다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이 없는 곳을 찾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아직 그런 곳이 남아 있을 테고, 자신도 거기서 인간이기를 그만둘 날을 맞이할 거라고 다짐했다. 이제 한 해만 지나면 서른이니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 다카무라 가오루의 글을 읽고 있자면 그냥 문장을 읽고 있는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어디를 가도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 이들과 다카무라 가오루 특유의 훅훅 찌는 열기로 가득한 거리,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 속으로 끌어당겨지는 등장인물들의 길디 긴 독백. 체감온도로는 일본에서 가장 덥다는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험이 고스란히 배어들어가 있어서인지 많은 작가들 주에서도 그녀가 묘사하는 여름은 유독 뜨겁고,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잉하고 울리는 태양빛이 집요하게 따라드는 기분이다. '조시'에서 노다 데쓰오는 항상 일천 도가 훌쩍 넘는 용광로의 열기를 응시하고, '마크스의 산'은 겨울이 주 배경이었음에도 중간중간 잠깐 등장하는 눅진하고 후텁지근한 한여름 도쿄의 묘사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그녀의 작품에는 가장 뜨거운 열기를 한데 응축한 듯한 부분들이 있고, 그 부분들은 항상 나를 끌어당긴다.
땀이 흘러내리는 걸 막기 위해 이마에는 수건을 두르고, 얼굴에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려고 또 한 장의 타월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긴소매 작업복에 면장갑을 끼고 작업을 하다보니 점심때쯤이면 옷에서 소금기가 묻어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일본에서 가장 지독한 이 지방의 더위는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사람도, 땅도, 공기도, 리프트의 엔진 소리마저도 더위에 미쳐버렸다. 고다는 차라리 그 더위 속에서 머리와 근육을 다 태워버리고 싶었다. 지독한 더위에 살균되어 멸균 상태에 가까워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몸속에 숨어 있던 것을 더 심하게 후벼 파냈을 뿐이었다.
- p. 22.
. 이런 다카무라 가오루 특유의 찌는 듯한 여름 한가운데서, 어딘가 결락되어 있는 여섯 남자들이 '무모하고 대담하며 정신나간 이야기'를 위해 누군가는 자신감 있게 큰 걸음으로, 다른 누군가는 마지못해 어정어정 모여든다. 다이너마이트 운반차량을 덮쳐 폭탄을 강탈하고, 건물을 경비하는 보안부서를 무력으로 마비시키고,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 은행의 전기배선과 보안장치를 모조리 파괴하고, 은행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금고 500kg을 탈취한다. 고다의 말마따나 '기교도 없고 섬세하지도 않지만 기발하고, 전체적인 맥락이 없는 것처럼 충동적이지만 통쾌하기 짝이 없는 대단원'을 위해.
. 이런 계획만큼이나 작가의 글 역시 거칠고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오로지 엄청난 필력을 무기삼아 우격다짐으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황금을 탈취한다는 계획 사이사이로 폭주족과의 충돌과, 도망친 정보원을 사이에 둔 일본 내의 남북한 조직들과 공안의 개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걸림돌이 되는 사건들이 발목을 잡아채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질려버린 고다의 내면이 끊임없이 읊조려진다. 그리고 방해가 극에 달해 여섯 남자들 중 하나 둘 퇴장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계획이 위기에 빠지는 그 순간, 다카무라 가오루는 선언한다. '날씨는 쾌청, 세기의 대도적이 오사카를 누빌 날이었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가던 이야기는 무서운 속도로 결말을 향해 곧은 일직선을 그리면서 달려가기 시작한다.
울타리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도시에 아침이 왔다. 지붕들이 누렇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사히맥주의 굴뚝 연기가 곧게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다. 조차장에서 움직이기 시자하는 열차 소리가 들려왔다. 날씨는 쾌청. 세기의 대도적이 오사카를 누빌 날이었다.
- p. 297.
. 성당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불타버린 성당과 가족들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정신적 외상을 안고, 텅 비어버린 내면을 안은 채 그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인간이 없는 땅'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고다. 남북한과 일본 모두에게 쫓기다가 살아남기 위해 형까지 죽여버렸지만 더 이상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살아야 할 의미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모. 성당을 불태운 게 자신이며 그로 인해 평생 마음의 짐을 가지고 속죄하며 살아가고 있는 영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뒤없이 자신만만하게 충동에 몸을 맡기는 기타가와. 능수능란하고 자신만만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약하고 여린 노다. 정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모든 것에 혼란스러워하는 하루키까지. 다카무라 가오루는 그녀 특유의 꼼꼼하고 집요한 묘사를 통해 그들이 변하는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결국 그 끝에서 고다는 '인간이 없는 땅은 이제 아무려나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게 된다. 비록 그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지만, 과거와도 화해하지 못한 채 그저 흘려보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같은 작가의 마크스의 산과 조시가 떠올랐다. 비록 한 쪽은 형사고 한 쪽은 도둑이지만 모두 '고다'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들. 모두 강인하고 한 치의 틈도 없어보이는 인물들이지만, 실제로는 마음 속 어딘가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방황하고 있다. 그나마 이 소설의 고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도 결국 '새로운 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쪽에서의 고다는 '레이디 조커'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작가가 이들 모두에게 안식처를 허용해 줄 날은 언제일까.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
. p.s. 이 책에는 '초요환'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오는데, 책에도 분명히 한자까지 별도로 표기되어 있으니 번역의 문제는 아니고, 임요환처럼 한국에서도 한자 표기 문제로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요환'이라는 이름을 쓰는 게 없는 경우는 아니다. '초'씨도 희성이긴 하지만 분명 있는 성이고. 왜 굳이 이런 희귀한 이름인지가 의문일 뿐.
. p.s. 2. 이 소설을 가지고 무려 우미노 치카(!!!!)가 그린 동인지가 있다. 구할 수 있는 건 표지뿐이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