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이 천연덕스레 교차되는 이야기들

빵가게 재습격 - 무라카미 하루키(창해) ●●●●●●●○○○

by 눈시울
빵가게 재습격 1.jpg
빵가게 재습격 2.jpg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는 계속 울렸다.
벨은 어둠 속에 떠도는 먼지를 둔하게 휘젓고 있었다.
나도, 아내도, 그 동안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두 개의 종이 가방에 서른 개의 빅맥이 들어가자 아내는 라지 컵의 콜라를 두 개 주문하더니 그 값을 지불했다.

"빵 이외에는 아무것도 훔칠 마음이 없어요." 하고 아내는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여자아이는 복잡한 형태로 머리를 움직였다. 그건 고개를 가로젓는 것 같기도 하고, 끄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양쪽의 동작을 동시에 한 것이리라. 그녀의 마음을 나도 어딘지 모르게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 31. 빵가게 재습격



. '일각수의 꿈'과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에 이어지는 이번 단편집에서 하루키는 지극히 평이하고 일상적인 문체로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서술해나간다. 그것은 코끼리가 소멸되는 것처럼 아예 현실에서 벗어난 일이기도 하고, 아내와 같이 맥도날드를 습격하거나 알 수 없는 여성으로부터 알 수 없는 전화를 받는 것처럼 일단 현실에 발을 붙이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 그런 사건들을 하루키는 과장도 놀람도 다른 작품에서 보여주던 특유의 아련함조차 배제하고 그저 담담하게, 약간은 장난기를 섞어 서술해나간다. 그래서 이번 단편들은 한 문장, 한 단락씩 읽어나가면 어딘지 소설보다는 에세이의 그것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마치 에세이처럼 담담하고 유쾌하게 써내려간 단편들을 읽고 있자면 점점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뒷좌석에는 레밍턴의 자동 산탄총이 경직된 가늘고 긴 물고기처럼 누워 있고, 아내가 걸친 겨울 파카 주머니에는 예비 산탄이 달그락거리는 마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트렁크에는 검은 스키 마스크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어째서 아내가 산탄총을 소유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키 마스크도 마찬가지다. 나도 그녀도 스키 같은 것은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그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질문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이라는 것은 뭔지 모르게 기묘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 p. 23. 빵가게 재습격



. 산탄총을 들고 갑자기 맥도날드를 습격하더니 코끼리가 '소멸한' 사건 뒤에 지극히 유쾌한 가족극이 벌어지고, '1973년의 핀볼'에서 떠났던 쌍둥이를 우연히 다시 목격하는 단편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갈수록, 하루키가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는 비일상에 점점 익숙해져 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하루키만의 천연덕스러운 비일상은, 이후의 '태엽감는 새'나 '1Q84' 등의 소설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이렇게 하루키는 장편과 장편 사이에서 변화를 시도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단편을 통해 먼저 운을 띄운다. 그래서 하루키의 장편만을 따라가다보면 책마다 정신없이 스타일이 바뀌는 느낌이지만, 그 사이에 단편들을 출간순서대로 끼워서 차례대로 읽다보면 그런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하루키의 팬이라면, 한 번 정도는 출간순서대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는 계속 울렸다. 벨은 어둠 속에 떠도는 먼지를 둔하게 휘젓고 있었다. 나도, 아내도, 그 동안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아내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스물 네 번까지 벨 소리를 세고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맘대로 울라고 내버려뒀다. 언제까지 그런 걸 세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 p. 213.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keyword
이전 10화오로지 끝을 향해 대담하고 우직하게 질주하는 하드보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