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길고 어둡던 시기에 만난 티없이 훈훈한 이야기

세상의 봄 - 미야베 미유키(비채) ●●●●●◐○○○○

by 눈시울


"사람이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다.
또는 돌아가지 않기로 정했을 때."



문제나 짐이 당사자에게는 절대로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문제나 짐에 짓눌리거나,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기타미 시게오키는 후자를 택했다. 그의 문제나 짐은 혼의, 마음 속 일이고 실체가 없는 터라, 실체가 없는 타인이라 해도 타인이기만 하면 역할 분담이 가능할뿐더러 힘을 합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필요한 타인을 만들고 말았다.

- 1권, p. 428.




.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가 1987년에 '우리 이웃의 범죄'로 데뷔한 지 30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쓰여졌다고 한다. 데뷔 30주년이니 2017년에 쓰여진 책인데, 그 전후로 미야베 미유키는 에도시리즈에선 '삼귀'와 '금빛 눈의 고양이', 현대물에선 '희망장'과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를 차례로 써냈다. 하나같이 공들인 수작들인데 그 사이에 900쪽 짜리 대작이 자리잡고 있으니, 새삼 이 시기의 집필량이 어마어마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거기다 작품의 질은 좀 (초기에 비해)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책 표지의 완성도에 있어선 누구나 인정하는 비채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에서 나온 책이다보니 분홍색과 에메랄드 그린의 상하권 표지만 봐도 치유, 위로, 회복이라는 키워드들이 절로 떠오른다. 제목까지도 '세상의 빛'이다보니 과연 미야베 미유키 여사가 어떻게 훈훈하게 이야기를 풀어갈 지 한껏 기대가 되는데, 실제로도 너무 훈훈한 쪽만 부각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이야기였다.


. 30주년 작품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이 당시 미야베 미유키가 쓰고 있던 작품들이 한껏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인지 이 이야기만큼은 읽는 이에게 위로만을 주고 싶다는 여사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번의 역사에 단단히 뿌리내린 악의 연쇄고리와, 그로 인해 어린 시절에 깊은 상처를 받고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가며 도피했지만 결국은 어둠에 사로잡히게 된 주인공. 거기에 마을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그 비극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이유를 알아내려 애쓰는 도입부는 무척 어둡지만, 그에 비해 위기는 너무 쉽게 마무리되고, 악은 너무나 무력하게 제압된다. 그리고 남은 분량은 오직 서로 간의 선한 마음과 위로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순수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낯이 뜨거워질 정도다. :)


. 그나마 이 소설이 나온 시기가 다른 때였다면 좀 더 매몰차게 평가했을지도 모르지만, 절묘하게도 이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코로나가 막 세계를 휩쓸고 모두가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던 2020년 초의 일이었다. 길었던 겨울이 막 끝나던 시기에 갑작스레 시작된 길고 길었던 코로나 사태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무겁디 무거웠던 시기에 표지만 봐도 위로가 되는 책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지금에도 마음을 누그러들게 하니까. '세상의 봄'이라니. 얼마나 티 한 점 없이 훈훈한 제목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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