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거미의 이치 - 교고쿠 나츠히코(손안의책) ●●●●●●●◐○○
"자신이 열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한 일입니다.
그건 대개 변명에 지나지 않아요.
열등하니까 어쩔 수 없다, 못하는 건 못한다 - 변명이지요 - "
. 이 소설, 쉽지 않다. 지금까지의 교고쿠 나츠히코가 어려웠던 건 작품마다 풍속과 종교와 잡학에 대한 어마어마한 지식기반을 가지고 풀어내는 교고쿠도의 장광설 때문이었지 사건 자체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는데, 이 작품에 이르면 장광설 이전에 사건 자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관련없는 사건들이 터져나오고, 미궁에 빠진 각각의 사건을 해결해봤자 그게 전체 사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다른 사건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통 종잡을 수가 없다. 제목처럼 거미줄의 씨실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다.
"관계자가 자기 형편에 맞게 움직여주도록, 미리 사방팔방에 수면에서 압력을 가해둔다 - 는 게 거미의 수법이다. 이 경우에도 갈림길이 무한하게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친 그물에 걸려든 경우에만 유효하게 활용하고, 걸려들지 않은 경우에는 무시한다는 수법이지."
"무시?"
"그래. 다시 말해서 장기 말의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을 항상 전제로 한 계획이란 말이지. 반드시 실패할 거라고 짐작하고 미리 손을 써두는거야. 예방선을 친다. 성공한 경우에만 기능하는 덫을 만들어 둔다 - 이건 예측은 빗나가는 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계획이야."
- 2권, p. 454.
. 불교와 선종을 다뤘던 지난 '철서의 우리' 편과는 달리 이번 '무당거미의 이치'에서는 특이하게도(하기야 교고쿠도의 장광설 중에 뭐 일반적인 게 있었겠냐만은) 일본인에게 낯선 외래종교가 다뤄진다. 그래서인지 어렵다어렵다하면서도 거침없이 선종을 요리해나가던 철서의 우리 때와는 달리 그냥 겉만 휙 훑고 지나가고, 대신 페미니즘을 다루는 부분이 더 흥미롭게 읽힌다. 아무래도 50년대가 배경이다보니 페미니즘 그 자체보다는 남녀간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사회의 원인을 탐구하는 쪽에 가깝기에, 요즘 페미니즘 측의 논리전개나 주장과는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용감해야 한다 - 그리고 용감한 것은 계집애 같은 것보다 우수하다 - 라는 일그러진 사고방식이 당연해진 건 최근의 일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국가가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행위에 물든 시기에 반드시 나타나는 법입니다. 여기에는, 남자는 잠자코 전쟁에 나가서 잠자코 죽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해 둬 - 라는 이면이 있어요." (3권, p. 108.) 라든가, "이유는 단순합니다. 국민을 모두 무사 - 병사로 만들기 위해서예요. 징병하기 편리한 호적제도, 전투 의욕을 깎아내지 않는 정숙한 아내 - 이런 상식들은 남자는 밖에 나가 싸우다가 자각없이 죽어달라고 말하는 제도입니다." (3권, p. 261.) 같은 작가의 주장은 끝없이 늘어선 것 같은 현재의 평행선을 넘어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함으로써 해결의 시작점을 슬쩍 엿보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성리학 원리주의를 기반으로 남녀불평등이 심화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6.25와 김신조 사건, 그로 인한 징병제가 남녀평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건 새삼 곱씹어볼만한 얘기가 아닐까.
. 또 하나.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엔 딱히 생각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었는데, '악마의 삶' 운운하던 n번방 사건의 진범과 '악마가 아닌 쓰레기'라고 반박하던 모 감독의 발언을 보고 책을 다시 읽어보니 자신은 열등하다, 그래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범인을 향해 일갈하는 저 부분이 상당히 깊이 들어온다.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처럼, 우리는 범죄자에게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을 씌워 우리와 구분하려 들고, 이를 통해 안심하려 든다. 하지만 조주빈이 말했던 것처럼, 오히려 그런 생각이야말로 범죄자 스스로를 합리화시켜주고 있던 것이다.
. 이 책의 여러 범인 중 한 범인은 자신을 인간쓰레기라고, 버러지라고, 열등한 인간이라고 부르는 살인자가 나오는데,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은 열등한 인간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게 더 소름끼치는 일이다. 악마든 악마가 아닌 쓰레기라 하든 그 표현이 위인지 아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그들이 자신을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기준과 책임에서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고쿠도는 그런 이들에게 -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조차도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 책임을 회피하지말고, "인간으로서" 그 벌과, 비난과, 무게를 남김없이 다 받으라고 단호하게 일갈한다.
"우리가 고대의 인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많은 상식은 고작해야 메이지 시대에, 정치적인 역학이 작용해서 날조된 상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중략) 그것을 수백 년이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 3권, p.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