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가센코인가 하는, 제게는 친숙하지 않은 이름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이름이 아니에요. 이제 아무도 그 이름으로는 불러주지 않지만, 제게는 확실히 이름이 있어요. 저는 그 이름을 잊지는 않았어요. 벌써 몇 년이나 불리지 않았지만, 그 이름만이 저와 과거를 잇는 유일한 증거랍니다. 제가 가센코라는 실체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단 하나의 증거예요. 그러니까 -" - 나 같구나. 인가.
"당신은 - 이름이 뭔가요?"
"저는."
여자는 처음으로 표정을 무너뜨렸다.
"저는 사에키 후유라고 해요." 그리고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 연회의 준비편 하권, p. 71.
. 어마어마하다. 각 권당 4-500쪽을 꽉꽉 채운 두툼한 책이 네 권. 책마다 누리보토케니 효스베니 이와나카히메니 하는 교고쿠도 특유의 장광설이 하나씩은 꼭 들어차 있고, 매 권마다 등장하는 교고쿠도 패거리(이후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장미십자단^^;)는 물론 기존 시리즈에 나왔던 아카네 양과 아케미 씨와 나이토 군, 그리고 앞으로의 시리즈에서 활약할 것 같은 또 다른 요괴전문가 다타라 군과 이미 백기도연대에서 한껏 활약(?)한 하타 노인, 그리고 교고쿠도 시리즈의 최종 보스가 아닐까 싶은 도지마 대령까지. 그간 교고쿠도 시리즈의 총집합이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가 한껏 부풀어 정점을 찍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는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곤 없는 겁니다"와 "세상에는 이상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와의 대결이라니, 읽어야지. 무조건 읽어야지.
. 솔 출판사에서 소설로, 그리고 삼양출판사에서 시미즈 아키의 만화로 나온 백기도연대 시리즈가 딱 도불의 연회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교고쿠도 시리즈의 출간이 끝없이 늦어지다보니(06년 '광골의 꿈'이 나오고 07-08년에 '백기도연대 시리즈'가 완간되었는데, 정작 도불의 연회는 2015년에나 '연회의 준비'편이 나왔다) 시간 순서가 완전히 꼬여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동안에는 백기도연대를 읽어도 가센코가 누구길래 그동안의 일을 뉘우친다는건지, 하타 노인은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이상한 일만 꾸미고 다니는지, 도리구치가 왜 아츠코 얘기를 하며 아오키를 놀려먹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도불의 연회를 읽으면 그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백기도연대와 도불의 연회 둘 중 하나를 읽었다면 꼭 나머지 하나도 읽어야 한다. 만화책도 강력 추천. :) 하긴 이 책까지 따라올 정도의 열혈독자 중에서 아직도 백기도연대를 안 읽은 독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오키는 도리구치에게 시선을 보냈다. 도리구치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장미십자단이에요."
"자, 장미십자 - 라니."
"우리는 에노키즈 씨의 하인인 것 같고, 탐정은 아니니까 탐정단이라고 할 수 없고 - 뭐 그런겁니다. 괜찮죠 -?"
- 연회의 시말편 하권, p. 239. '장미십자단의 역사적인(?) 시작. :)
. 다시 도불의 연회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장광설은 분명 폭주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효스베나 누리보토케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이와나카히메 같은 건 그냥 말하고 싶어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분량이 방대해지는 건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내용을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구조만을 이야기해본다면 한 지점에서 퍼져나간 각자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한 채 각각 뻗어나가고,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는 힌트로 또 다른 이야기가 주어진다. 물론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이니 뭔가 하나 부족한 거 아닌가 싶은 부분에선 역습이 준비되어 있고. '무당거미의 이치' 때부터 교고쿠 나츠히코는 이야기의 구조를 설계하는 자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야기의 정교함에 있어선 무당거미의 이치가 좀 더 위지만 그 압도적인 규모에 있어선 이번 도불의 연회가 끝판왕이라 할만하다. 사실 균형을 놓고 본다면 오히려 1/3 정도는 더 분량이 늘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되면 추리소설이 아닌, '대하추리소설'이 되어버렸을테니까. :)
"자연을 통제하고 싶다는 바람이 뒤집혀서 영혼 신앙이 되고, 한편 마찬가지로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기술이 연마되었다 - 즉 원령과 기술은 자연을 상대하기 위한 양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술의 진보와 보급에 따라 영혼 신앙은 서서히 효력을 잃고, 자연에 대해서 품고 있던 경외심이 그대로 슬라이드 되어, 본래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쌓였을 기술로 향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 "
"그래서?"
"자연현상인 공중방전이 뇌신 님이 된 것처럼 - 기술 자체에도 인격이 주어졌지요."
- 연회의 시말편 상권, p. 373.
. 그렇게 압도적인 스케일의 책이다보니, 아무리 시리즈라지만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잘도 내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4권, 총 2천쪽에 달하는 분량만 해도 만만찮은데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그 어느때보다도 극심하다. 전편부터 수행하는(....) 결의로 꾸준히 따라온 독자가 아니라면 이런 장광설은 도저히 읽을 수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우부메의 여름 첫 부분을 읽고 이거 초반부가 왜 이렇게 팍팍한가 했던 시절의 나는 그저 애송이였구나(....) 깨닫게 될 정도로 작가도, 독자도 혼연일체가 되어 하드코어하게 쓰고 읽는 게 이 책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철없이 이런 책을 내달라고 했다니 나라도 꼭 읽어야지 하면서 출판사에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버틸 수 있다. 그러니 중간 유입 같은 건 어림도 없을테고, 이 책을 내고 출판사가 심한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들인 품에 비해 판매는 기대하기 어려운 책이다. 이런 책이 나와준 것만 해도 고맙고, 다음 시리즈를 또 10년(....)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이제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정말로. 감사하고, 그저 감사하고, 압도적으로 감사할 뿐.
"그럼 여쭙지요. 의미가 있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득이 있는 것이나 구원이 있는 것이나 근거가 있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나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나 근거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이유는 없어요." (중략)
"어떤 존재도 어떤 상태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한 - 그건 일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