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것만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기록

활자잔혹극 - 루스 렌들(북스피어) ●●●●●●●●○○

by 눈시울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 추리소설, 아니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소설을 대상으로 놓더라도 손에 꼽을만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읽고, 영화 '조커'를 보고 나서 받았던 느낌을 다시 받았다. 뭔가 이정도라면 단순히 종이와 활자를 넘어, 개인의 느낌이나 감상을 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 첫 문장에서 얘기되는 것처럼 이 소설은 문맹인 주인공 유니스 파치먼이 한 가족을 몰살시키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간다. 그녀는 한창 교육받아야 할 시기에 발발한 2차대전으로 인해 시골로 피난을 가야 했고, 그곳에서 그녀를 떠맡은 이들은 생활고 때문이었는지(이유가 확실히 나와있지는 않다) 그녀를 방치했다. 뒤늦게 부모가 그녀를 시골에서 다시 데려왔지만, 하층 노동계급이었던 그녀의 부모 역시 그녀의 교육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온통 폐허가 된 와중에 간신히 진행되던 수업에서 글자를 읽지 못하는 그녀에게 따로 신경을 써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교실 맨 뒤에 앉아 뒤쳐진 채로 멍하니 시간을 보냈고, 10대 초반을 갓 지난 나이에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마저도 끝이 났다. 그렇게 그녀는 문맹이 되었다.


. 마치 인간극장에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필요 이상으로 그녀를 불쌍하거나 무능하게 그려내지는 않는다. 가사노동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일머리도 요령도 뛰어났고, 딱히 지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문맹이 들통날 뻔한 상황에서 긴 구매목록을 듣는 것만으로 리스트를 통째로 외워서 위기를 모면하는 기억력이나 상황대처능력을 보면, 지능은 오히려 뛰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그녀의 세계 속에서 그녀는 아무 부족함도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 채로 나름 넉넉하게 살아왔다. 그녀는 단지 글을 읽지 못할 뿐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우연찮게 상류 지식계층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는 것과 음치라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게 모든 일은 시작됐고, 그녀는 낯선 '괴물'이 되었다.


. 루스 렌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냉정하게 느껴질만큼 덤덤하게 그려낸다. 얼마든지 어느쪽으로든 기울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녀는 결코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은 채 몇 걸음 물러선 채로 인물의 모습을 따라갈 뿐이다. 심지어 문맹이라는 점이 충분히 동정하고 변명할만한 요소가 될 수 있음에도 주인공을 합리화시키지도 않는다.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가에 들어가기 이전부터도 이미 변명할 수 없는 협박범이며 살인자였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얄팍한 계층론에 기대 그녀를 변호해보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차단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해 리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커버데일 일가 역시 마찬가지다. 중산층 혹은 그보다 살짝 높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고 고전과 오페라를 즐긴다는 것으로 그들을 '가진 자'의 집합에 넣어 이 소설을 가진 자와 못 가진자의 구도로 쉽게 이해한다면 편하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얄팍하지 않다. 그래서 몇몇 리뷰들은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걸 알았던 조지가 TV 화면에 가득한 문구를 보고 "당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도 아니니까." 라고 말하는 부분을 통해 그에게 책임을 지우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조지가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걸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가 처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은 유니스가 그의 딸에게 '귀찮은 추잡한 매춘부'라고 했다는 것을 안 뒤라는 사실은 슬쩍 넘어가버린다. 그 부분을 넣으면 유니스는 배우지 못한 불쌍한 약자고 커버데일 일가는 그런 그녀를 조롱하는 가진 자라는 구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스 렌들은 그런 선악구분이 분명한 이야기를 할 의도가 없었다. 대부분의 현실에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루스 렌들은 그저 이야기할 뿐이다. 한 아이가 있었고, 전쟁과 그 이후의 어려웠던 사회는 그런 그녀에게서 읽고 쓰기를 배울 기회를 앗아갔다고. 그렇더라도 그게 딱히 불편함으로 여겨지지 않는 -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정도'로 여겨지는 - 사회가 어디 먼 곳의 후진국이 아닌,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영국사회의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다른 두 사회가 만났을 때 한 사람은 괴물이 되었고, 괴물이 되었으니 참극이 일어난 것이라고. 이 책은 그렇게 첫 문장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단절과 고립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유니스가 자신을 파멸에 빠뜨린 결정적인 증거(이미 스포할 건 다 했지만, 그래도 이 부분만큼은 스포 방지를 위해 생략)가 대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아마도 낯선 곳 한복판에서의] 자신을 보고 쓰러진다는 완벽한 결말을 보는 그 순간에, 읽는 이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는 이야기의 첫머리를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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