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파리에서 좀 행세하려면, 말 세 필 이외에도 낮에 탈 수 있는 이륜마차와 밤에 이용하는 이인승 사륜마차가 필요하지. 거마비로만 적어도 구천 프랑이라네. 거기다 의상 값으로 삼천 프랑, 향료 값으로 육백 프랑, 구두 값으로 삼백 프랑, 모자 값으로도 삼백 프랑이 들게 마련이네. 그 비용을 쓰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네. 게다가 세탁집 여주인에게 천 프랑을 지불해 줘야 되네. 유행을 좇는 젊은이들이며 내복 종류도 모두 다 갖추어야 하네. 그것들이 남의 눈에 띈다고들 안하나? 연애와 교회는 모두 멋진 제단보를 필요로 하거든. 이제까지 계산한 것만도 일만 사천프랑이나 된다네. 자네가 도박이나 선물 사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에 안 넣고 말일세.
- p. 209.
. 이 책을 분명 한 번은 읽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이야기의 맨 마지막에 자식에게 모든 걸 다 퍼줘서 망했다던 고리오 영감의 절규 외에는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거기다 재미있었다는 기억도 전혀 없다보니 약간 편견을 가진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손에 땀을 쥐거나 이야기에 몰입해서 읽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각만큼 고리타분하지도 않았다. 이 시대 프랑스 문학 특유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정적인 고해와 감정의 분출과 격한 토로와 피땀눈물(....)을 슬쩍슬쩍 회피하고 나면, 의외로 꽤 수월하게 읽힌다. 약간 위대한 개츠비 느낌도 있고, 지금은 감옥에 갔다가 나온 모 연예인의 '아부지가 그지처럼 살지 말랬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
. 지방에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올라온 수재 청년 라스티냐크(얼굴도 나름 준수하다)는 신분 상승의 야심을 품고 사교계 여기저기를 찔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학생이기에 지금은 그저 파리의 하숙집 방 한 칸에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하숙집에는 발자크의 소설이 으레 그렇듯 각자의 확고한 이미지를 가진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모여 살고 있다. 정체는 불분명하지만 유쾌하고 자신만만한 보트랭, 과거의 아름다움이 아직 약간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는 퇴색되고 실패한 자신의 무채색 삶에 질린 채로 살고 있는 미쇼노 양, 청순하다기보단 가련한 쪽에 가까운 '창백한' 빅토린 양, 그리고 은퇴한 상인인 고리오 영감 등등.
. 발자크는 그들에게 각자의 서사를 부여하고,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각자의 이야기는 한데 얽혀 손쓸 수 없는 곳으로 치닫는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아버지가 있으면서도 오빠에 밀려 단 한 푼의 재산도 없이 하숙방에서 살고 있는 빅토린 양의 사연이 죽 펼쳐지더니, 갑자기 보트랭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해 라스티냐크에게 빅토린 양이 모든 재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음모를 꾸밀테니 둘이 결혼해서 부자가 되라고 권유한다. 물론 부자가 되면 자기를 깊이깊이(....) 생각해줘야 한다는 건 당연한거고. :)
. 제안을 받은 라스티냐크가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가운데 음모는 지지부진하게 묻히는가 싶은데, 여기서 갑자기 이야기가 고리오 영감의 두 딸에게로 넘어간다. 각각 귀족과 기업가의 부인으로 상류사회에 속해 있지만 딱히 결혼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은 두 딸. 그러던 중 라스티냐크가 두 딸 중 하나인 뉘싱겐 부인에게 반하고 고리오 영감은 영감대로 자신의 딸인 뉘싱겐 부인과 라스티냐크를 엮어주려고(어 그거 불륜인데? -.-) 한다. 결국 라스티냐크는 뉘싱겐 부인과 맺어지는데, 갑자기 여기서 잊혀진 듯했던 음모가 부활해서 빅토린 양의 오빠가 결투를 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응?)
좋아. 나는 천삼백오십 프랑의 영속 연금공채를 팔았지. 또한 만 오천 프랑의 종신 연금을 저당잡혀 천이백 프랑을 챙길 수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남은 돈으로 상인들에게 지불했어. 나느 저 위층에서 일년에 백오십 프랑짜리 방을 쓰면서 하루에 이 프랑씩 왕자처럼 살아갈 수 있을 테고. 그래도 돈이 남을 거야. 나는 낭비할 필요가 없고 옷도 거의 필요없어. 이래서 나는 이 주일 동안을 <그애들이 행복하게 살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혼자 빙긋이 웃고 지냈지. 자, 너희들은 기쁘지 않으냐?
- p. 295.
. 이제 음모가 성사되고 부자가 될 일만 남은 상태에서 미쇼노 양의 제보에 의해 보트랭이 탈옥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찰에 체포되고, 정작 라스티냐크는 음모는 나몰라라 하며 빅토린과 뉘싱겐 부인 사이에서 번민하는 콩가루 막장 스토리.... 이 산으로 가는 스토리가 대체 어떻게 마무리가 될 수 있는건지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를 보며 슬슬 걱정이 될 즈음 딸들이 고리오 영감의 재산을 거머리처럼 뜯어가고 고리오 영감은 빈털터리가 된 상태에서 병으로 쓰러지는 급전개가-_- 덤벼라 임성한, 덤벼라 순옥킴(....)
. 이러니 마지막밖에 기억이 안나는 것도 당연했다. 이게 대체 무슨 고전문학인가 싶긴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나 고전이지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따끈따끈한 신간이었던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고 피가 끓어오르던 프랑스인들은 마치 지금의 우리가 연재 웹툰을 보는 것처럼 한 편 한 편이 나올 때마다 라스티냐크의 야망이 이뤄질 수 있을지 예상하고, 빅토린 파와 뉘싱겐 파로 나뉘어서 과연 누가 진히로인(....)인지 열띤 논쟁을 벌였을 게 분명하다. 물론 발자크는 편집자를 통해 실시간으로 이런 반응을 전해들으며 끊임없이 간을 봤을테고. 그러다 도저히 스토리가 감당이 안되니까 와장창 급마무리하면서 "파리여! 이제부터 너와 나의 승부다!" 라고 그럴싸한 대사 한 마디 투척하고 다음 작품으로 훌쩍. 아니 근데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이거 정말 완전 웹툰 그 자체인데? :)
네가 꺼낸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첫머리에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야. 그런데, 너는 이 어려움을 단번에 뛰어넘고 싶은가 보지. 그러려면 이 친구야, 너는 알렉산더 대왕이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감옥으로 가게 되는거야. 나는 시골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고지식하고 보잘것 없는 생활을 하게 될 터인데 그걸로 만족하고 있어. 인간의 감정이란 가장 좁은 곳에서나 가장 넓은 곳에서나 똑같이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 나폴레옹도 저녁을 두 번 먹지는 않았어. 성 프란체스코 교회 기숙생인 의대생보다도 애인이 더 많지도 않았어. 여보게, 우리의 행복이란 우리 발바닥에서부터 후두부까지 사이에 있는거야. 일 년에 백만 루이를 쓰건 백 루이를 쓰건, 우리 마음속에서 본질적으로 느껴지는 정도는 같은 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