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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Oct 05. 2024

한 시대가 무너진다, 모든 것이 휩쓸려 없던 것이 된다

압살롬, 압살롬 - 윌리엄 포크너(민음사)  ●●●●●●●●○○


아니야. 아니야. 난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 난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




   "나는 남부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야." 퀜틴은 신속하게 즉시 말했다. "나는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나는 증오하지 않는다. 그는 찬 공기 속에서, 얼어붙은 뉴잉글랜드의 어둠 속 찬 공기 속에서 거칠게 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니야. 아니야. 난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 난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 

                                                                                                                                                          - p. 539.




   . 19세기 초의 미국, 신분도 가문도 재산도 없는 산골의 가난한 백인 소년인 토머스 서트펜은 근처 저택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문지기 흑인에게 굴욕을 당한다. 그럼에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계기로 그는 재산을 모아 지주가 되어 지역사회에 편입되는 것으로 신분의 벽을 기어오르려 하고, 가문을 이루어 이를 영속시키겠다는 숙원을 품게 된다. 그러나 한 푼의 재산도, 아무 배경도 없는 그가 목적을 이루는 방식은 오로지 폭력과 피로 점철된 아귀다툼과 악다구니일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몇십년의 인생을 쏟아부은 끝에 드디어 한 마을에 정착하고 지역 유지의 딸과 결혼해서 아들과 딸까지 낳으면서 그의 숙원은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꿈이 이뤄진 것 같았던 종착점은 반대로 그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시발점이었다. 길고 참혹한 남북전쟁을 거치며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땅은 버려져 황폐해지고 더는 그 땅을 일굴 사람도 없다. 그가 인생을 걸었던 '남부'라는 사회 자체가 몰락해 버린다. 한때 숙원을 위해 악마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서트펜은 이제 무력하고 아집만 남은 쇠락한 노인일 뿐이었다. 





   즉 서트펜의 두 딸인 흑인 클라이티와 백인 주디스 그리고 두 사람으로부터 12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이모 로자, 그 세 사람은 각각 자신들이 있는 장소에서 거리를 두고, 혈관이 경화되어 절망에 허덕이는 그들의 늙은 악귀가 이미 그의 어깨에 올려놓은 창조주의 손과 파우스트적인 최후의 싸움을 펼치면서 호구지책을 위하여 작은 시골 상점을 경영하면서, 욕심 사납고 찢어지게 가난한 백인들과 흑인들을 상대로 한두 푼 돈 때문에 오랜 시간 지루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을 그리고 과거 한때는 자기 영역의 경계선을 넘지 않고 사방으로 100평방마일의 땅을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릴 수 있던 그가 노인이 되어 자기 동업자인 존스의 손녀딸을, 그것도 열다섯 먹은 시골 소녀를 유혹해서 파멸시키기 위해 값싼 리본과 구슬 그리고 오래되어 심하게 색이 변한 과자를 자기의 빈약한 재고에서 빼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 

                                                                                                                                                          - p. 267.





   . 더구나 몰락하는 과정에서 그가 진작 밟아 뭉개고 지나친 줄만 알았던 그의 과거가 집요하게 그를 따라와 목덜미를 낚아챈다. 그가 숙원을 이루기 위해 내버렸던 그의 첫 아들은 - 흑인의 피가 얼마간 섞인 아이였기에 - 그의 아들과 친구가 된 채 그의 딸과 연을 맺으려 들고, 모든 진상을 알게 된 그의 아들은 친구를, 그리고 이복형을 쏘아죽이고 사라진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숙원이 하나부터 열까지 물거품이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늙은 서트펜은 처제에게 아들을 낳아주면 결혼하겠다는 노망난 소리를 하다가 버림받고, 하인의 딸을 건드려놓고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그녀를 버렸다가 하인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남아있던 딸과 도망갔던 아들이 죽으면서 서트펜의 자취는 모두 끊겨버리고 만다. 단순히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서가 아닌, '남부'라는 사회적 공동체가 남북전쟁의 패전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헨리는 그들 세 사람 - 자신과 주디스와 본 - 을 미해결 상태에 놓아두면서, 마치 삼십여 년 전의 아버지 서트펜처럼, 양심과 자기가 원하는 것과의 타협점을 찾으려고 씨름을 하고 있었지. 아마 그는 이제 본처럼 운명론자가 되기까지 해서 자기와 본 어느 쪽이든, 아니면 둘 다 전사하여 모든 일이 깨끗이 정리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면, 남부가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귀중한 것, 열중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 저항하거나 참고 견디거나 죽어가면서도 지킬만큼 가치 있는 것, 아니 사는 목적이 될만한 것은 모조리 없어져 하나도 남지 않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 p. 387.




   . 대체 어디에서 문단이 끝나는건지 종잡을 수 없이 몇 페이지씩 이어지는 문장. 그런 숨쉬기도 버거운 문장들에 지쳐 슬쩍 넘어가다보면 어느샌가 바뀌어 길을 잃게 만드는 화자들과 시점들. 맨 뒷장의 연표와 인물소개가 아니고서는 내가 읽고 있는 이 지점이 이야기의 어디에 속하는 건지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는 불친절하고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몇번이고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지구 반대편의 어떤 인물과 어떤 집안, 어떤 세계의 악다구니로 가득한 성취와 곧이어 찾아오는 허무한 몰락을 다룬 이 쇠퇴의 연대기가 그동안 읽어왔던 구한말이나 6.25 전후를 다룬 우리의 이야기들과 꼭 닮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두 사람은 말라서 뼈가 앙상한 말을 탄 채 서로 마주섰다. 두 사람 다 같이 나이들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세파에 충분히 시달리지 않았으나 나이 든 눈을 하였고, 머리는 흐트러지고, 얼굴은 엄격하고 인색하기까지 한 조각가의 손에 의해 주조된 청동 조각상처럼 비바람에 시달려서 마르고 앙상했고, 해져서 기운 회색 군복도 지금은 가랑잎처럼 바래 버렸고, 본의 장교 계급장도 빛이 바래서 더럽혀져 있었으나, 헨리 쪽은 사병이었기 때문에 소매에 계급장이 없었다. 권총은 아직 안장 앞쪽에 있었다. 두 사람은 침착한 표정을 하고 목소리를 죽여, 찰스, 이 기둥이나 이 가지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가선 안 돼 하고 한 쪽이 말하면, 다른 쪽이 나는 밟고 넘어갈 거야, 헨리 하고 말하는 듯했다. (중략)


   ".... 그리고는 워시 존스가 미스 로자의 문 앞에서 안장 없는 노새를 타고 햇빛 쏟아지는 평화롭고 조용한 거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외쳤지. '당신이 로자 콜드필드인가요? 그럼, 잠깐 나와주셔야겠군요. 헨리가 그 프랑스 녀석을 쏘아죽였어요. 그를 소처럼 죽였단 말입니다." 

                                                                                                                                                          -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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