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 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사) ●●●●●●●●◐○
안녕, 가사하라 메이. 나는 뭔가가 너를 굳건히 지켜주길 빈다.
"저어, 태엽감는 새님, 아저씨가 지금 말한 것 같은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해요. '자아, 지금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라든가 '자아, 지금부터 새로운 자신을 만들자'라는 것 말이에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스스로는 잘했다, 새로운 자신이 되었다, 하고 생각해도 그 껍질 밑에는 원래의 아저씨가 있는 거고, 무슨 일이 있으면 그것이 '안녕하세요'하고 얼굴을 내미는 거예요. 아저씨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거 아녜요? 아저씨는 '외부'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자신을 바꾸겠다는 생각 역시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저어, 태엽감는 새님, 이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어째서 어른인 아저씨는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지금 그것에게 보복당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예를 들면 아저씨가 버리려고 했던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버리려고 했던 아저씨 자신으로부터."
- 2권, p. 154.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
. 1979년의 첫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부터 15년째에 나온 '태엽감는 새'는 사실상 이후 30년 간의 하루키의 방향을 결정한 작품이다. 어쩌면, 조금 더 과감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루키의 글은 이 작품을 통해 한 번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 장편을 거듭할 때마다 문체 중심에서 스토리텔링 중심으로 의 전환, 환상과 현실의 병렬, 홀로 선 개인의 이야기에서 개인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로의 확장 등 하루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글을 바꿔나가며 이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이런 시도들을 보여주는 단편들과, 그의 시선이 점점 넓고 먼 곳을 인식해간다는 걸 알게 해주는 에세이들이 있었다.
. 그리고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3년간의 유럽 체류와 4년간의 프린스턴 체류를 거치며, 하루키는 더 이상 사회에 대해 무심하게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그건 그가 익숙한 일본을 벗어나 긴 시간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본의 버블이 꺼지고, 더 이상 개인이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시대가 끝났다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더 이상 20대나 30대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모든 요인이 겹친 시기에 나온 게 이 태엽감는 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해변의 카프카'나, '1Q84', (그다지 언급할 의욕은 들지 않지만)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 그의 후기 장편들은, 모두 이 태엽감는 새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무릎 위에 얹혀 있는 자신의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나서 한 번 더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세상이었다. 이렇다 할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확실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결국 자신은 지금 곰과 호랑이와 표범과 이리가 '말살되어' 버린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 동물들은 오늘 아침까지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오후 네 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병사들에 의해 학살되었고 시체조차 이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그 두 개의 다른 세계 사이에는 뭔가 커다란 그리고 결정적인 '어긋남' 같은 게 있을 것이다. 또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그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세상이 언제나와 같은 세상으로 보였다.
- 3권, p. 121. 동물원 습격(혹은 요령없는 학살)
. 이야기는 지극히 '초창기의 하루키'스럽게 시작된다. 변호사사무소의 사무원 일을 그만두고 전업남편이 되어 시장을 보고 집안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는, 어느 날 늦은 아침 라디오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로시니의 '도둑까치'를 들으며 스파게티를 삶다가 알 수 없는 여자로부터 괴상한(성적인) 전화를 받고 끊어버린다. 그리고 집을 나간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다 근처 이웃집에서 괴팍한(?) 옆집 소녀를 만나 의미도 없고 연결도 되지 않는 대화를 나눈다. 결국 고양이는 찾지 못했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는 그의 무심함을 탓하며 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 가운데 1장이 끝난다. 전화에서든 현실에서든 누구도 다른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며, '그럴싸하게 있어보이는' 키워드만 나열되고 소모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 하루키를 시간 순으로 읽어온 독자에겐 지극히 익숙한 글이다. (실제 1장은 하루키가 젊었을 때 쓴 단편인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을 약간 개작한 글이기도 하다)
. 하지만 하루키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뤘던 젊은 날의 글로부터 시작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사라져 버린 아내.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어둠 속의 벽을 통과해 그녀를 만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 별 의미없던 대화를 나눴던 소녀와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점 서로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걱정하게 된다. 알 수 없던 익명의 통화와도 전화기 너머의 진실이 밝혀지며 이어지게 된다.
태엽감는 새님, 솔직하게, 솔직하게,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때때로 엄청나게 무서워져요.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나는 외톨이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모든 곳으로부터 5백 킬로미터 정도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는 캄캄하고, 어느 쪽을 봐도 앞날의 일 따위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정말로 큰소리로 외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지는 거예요. 혹시 태엽감는 새님은 그런 적이 없나요?
- 3권, p. 183. 여기가 막다른 곳일지도 모른다
. 그동안의 하루키와는 정반대로, 이 이야기에서 하루키는 누구 하나도 홀로 놓아두지 않으려 한다. 그게 누구든 누구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사소하고 무가치해보이는 것 같아도, 많든 적든 간에 누구든 세상의 태엽을 함께 감고 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멈추지 않고 끼익끼익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태엽감는 새'다. 지인도 친구도 죽은 옛 연인의 사진까지도 시간이 지나면 끊어지고 없어지는 게 당연했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세계에서 이런 변화라니. 그리고 하루키는 다시는 그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린 테러 사건을 보며 그의 방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후, 하루키는 가와카미 미에코의 인터뷰(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이 작품 이후 그가 일관되게 걸어왔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도 역시,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리라는 일종의 신뢰감 같은 것을 읽는 이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능한 한 선한 이야기를 쓰자는 의지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다"고.
지나가는 거리의 작은 불빛 몇 개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버스를 타고 산속의 공장으로 돌아가는 파란 털모자를 쓴 가사하라 메이의 모습과 어딘가의 풀숲 그늘에서 자고 있을 집오리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 내가 돌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안녕, 가사하라 메이"라고 나는 말했다. 안녕, 가사하라 메이. 나는 뭔가가 너를 굳건히 지켜주길 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조용히 잠깐 잠에 빠졌다.
- p. 4권, 마지막.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