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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지 않은, 흐릿하고 아련한 뭔가가 남아 떠돈다

스키마와라시 - 온다 리쿠(내친구의서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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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요, 선생님. 이 타일은 만지면 '과거'가 보여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기억을 맞춰가는 동안에 그 녀석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지.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면 정말은 없었던 그 녀석이 서서히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거야. '혹시 그런 녀석 없었어?' '있었지?' '맞아, 있었어. 그런 녀석.' 이런 식으로. 화제가 되면 될수록,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녀석의 존재는 더욱 확실해지지.

분명 그 녀석은 있었다.

"모두가 사실이라고 공유하면 그 녀석은 존재했던 것이 돼."

- p. 24. 형에 대해, 이름에 대해.



. '꿀벌과 천둥' 이후 몇년만에 온다 리쿠의 신작을 읽는다. 심지어 꿀벌과 천둥 전에 읽었던 책이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온다 리쿠가 한동안 뜸하긴 뜸했나보다. 10여년 전 정도만 해도 정말 더 이상 읽을 게 없어질 때까지 온다 리쿠의 책을 읽고 또 읽었고 없어질만하면 어딘가에서 나오고 또 나왔었는데. 이전 리뷰들에서 몇 번 얘기했듯이 00년대 후반의 온다 리쿠 붐은 일종의 '광풍'이라고 부를만한 정도의 것이었으니까.


. 그런 붐이 지나간 지 한참 된 후에, 조용하게 출간된 '스키마와라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단선적인 스토리 위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던 전작 꿀벌과 천둥과는 달리, 이 소설은 여기저기 갈라져 있는 갈림길들에 한 번씩 발을 들이밀어 보고, 이것저것 마주치는 것들을 슬쩍 건드려보고, 그때마다 멈추어 서서 뭔가를 떠올리고 숨을 가다듬어가며 진행된다. 골동품 가게라는 배경, 특정한 물건을 만지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기저기서 잠깐잠깐씩 나타난다는 하얀 옷을 입은 소녀의 이야기.




"하지만 이건 생각해보면 작가에게는 꽤나 리스크가 있는 기획이네요. 골동품과 컬래버레이션이라니."

다이고 하나코는 더욱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고다마 씨가 그녀를 본다.

"네. 지금 떠올랐는데요, 골동품이나 중고품은 실제로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물건이죠. 눈, 바람을 견딘 강함도 있고 각각 지닌 이야기도 있으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굉장한 존재감이 있잖아요."

그녀는 힐끗 가게 쇼윈도 쪽에 눈길을 주었다.

"그런 물건과 컬래버레이션해서 자신이 만든 게 맞설 수 있을지 생각했더니 어쩐지 두려워졌어요. 자신이 만든 게 과연 남게 될까, 제가 만든 게 잊혀도 골동품 쪽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무서워졌어요."

- p. 357. '다이고'에 대해, '하나코'에 대해.




. 그래서 온다 리쿠의 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지지부진하게 느껴지는 글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광풍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안다. 이 소설에는 딱히 명확한 결말은 없을거라는 걸. 그게 온다 리쿠의 글이니까. 뭔가 형태가 잘 잡히지는 않지만, 읽고 나면 흐릿하고 아련한 이미지가 남아 떠돌게 될 것이라는 걸. 그게 온다 리쿠의 글이니까. 그리고 간만에 그녀의 소설을 잡은 나부터도 그걸 바라고 있었고.


. 온다 리쿠는 이 글에서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다시 감아들이면서 이런저런 이미지를 내놓고 거둬들이는데에 집중한다. 그렇게 시도하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작가 역시도 뭔가 손가락에 걸리는 걸 찾으려 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과연 이 소설의 다음에 나오는 글은 어떤 것일지 기대하게 한다.



"태어난 시대는 선택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째서, 지금, 이 시대, '현대'에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어. 그야말로 예전에는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세상이 거의 변화하는 시대도 있었잖아?"

- p. 272. 풍경 소인에 대해, 느슨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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