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르의 한계를 극복하는 이야기의 힘

살의 - 프랜시스 아일즈(동서문화사) ●●●●●●●●○○

by 눈시울
살의 1.jpg
살의 2.jpg


그날 밤 비클리 박사는 줄리아를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떨면서 그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들레인, 만일.... 만일 내가 지금 당장 나하고 함께 살자고 하면.... 내 말을 들어주겠소?" 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마들레인은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그녀는 속삭였다.

"그럼,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군!"

"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최상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꼭 껴안고 성스러운 포옹을 나누었다.

날 밤 비클리 박사는 줄리아를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p. 142.




. 도서(倒敍) 추리소설이라는 게 있다. 지금은 추리소설 팬들 중에서도 좀 올드한 팬들이나 기억하고 있는 용어일텐데, '도'치 '서'술의 앞 글자만 딴 단어라고 보면 되겠다. 추리소설이라는 건 범인을 추리해 가는 이야기니까, 그 반대로 처음부터 범인이 밝혀진 상태에서 범인의 범죄담을 따라가는 것이다. 대신 일반 모험담과는 다르게 범인은 어디까지나 범인이고, 딱히 반전이나 범인에게 이입할만한 부분은 없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자만과 불안과 공포에 떨다 결국은 덜미를 잡히고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는, 어찌보면 정말 '교훈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내용이다. :)


. '살의'는 그런 도서추리의 교과서 같은 소설이다. 지방 의사인 에드먼드 비클리는 신분상승을 위해 지방의 몰락귀족인 줄리아와 결혼했지만 가문과 돈을 보고 한 결혼이 잘 되어나갈리 없다. 줄리아는 신분이 낮은 비클리를 멸시하고, 비클리는 비클리대로 줄리아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 채 결혼생활에 일찌감치 흥미를 잃고 동네의 여성들을 상대로 불륜행각을 벌인다. 그럭저럭(?) 그렇게 균형(....)이라고 할 만한 게 유지되어 가던 중, 비클리 의사는 대저택에 홀로 살고 있는 마들레인에게 자기 딴에는 운명이라고 할 만한 마음의 떨림(-.-)을 느끼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죽여버리기로 마음 먹는다.


. 프랜시스 아일즈는 얼핏 지극히 무난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이 뼈대에 막장 드라마틱한 요소를 대거 집어넣어 뛰어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실 도서추리가 가지는 가장 큰 단점은 시작부터 범인이 누군지, 트릭이 뭔지 읽는 이들이 알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수수께끼'가 배제된다는 것. 처음 한두번이야 독자들도 이런 색다른 구조의 이야기도 있구나 하면서 읽어보겠지만 그 구조에 익숙해지면 진상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굳이 따라갈 이유가 없다. 결국 작가들은 추리가 아닌 '이야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거나, 아니면 범인이 결정적으로 놓친 부분을 끝까지 숨김으로써 어떻게든 수수께끼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에 나오는 도서추리들이 대부분 수수께끼를 고수하려 드는 데 비해, 프랜시스 아일즈는 어떻게든 이야기에 힘을 싣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정말 '찌질하다.' 중2병과 고2병을 고루 섞어놓은 듯한 주인공은 아내에게 기를 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반발하며 동네의 이런저런 여성들과 불륜현장을 벌이지만, 결국 그 마음 속은 소심함과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주제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것 같은 상대에겐 금세 우쭐거리다보니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열등감과 근자감이 왔다갔다 한다. 그렇다보니 흔히 말하는 '어장관리' 당하기 딱 좋은 인물인데, 아니나다를까 마들레인은 그런 주인공을 기가 막히게 어장관리하더니 훌쩍 떠나버리고 주인공은 '내가 너를 위해 이런 짓까지(사실 별로 한 건 없다)했는데, 근데(!) 니가(!!) 감히(!!!) 나한테(!!!!)' 하는 식으로 분개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간다.


. 프랜시스 아일즈는 이런 주인공의 갈팡질팡하는 심리를 정말 잘 묘사한다. 어떻게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심리에 이렇게 정통할 수 있나 싶은데, 거기다 보통 찌질한 주인공에겐 어느 정도 동정심이라도 들기 마련인데, 비클리 의사의 찌질함은 전혀 그런 쪽이 아니다. 그냥 순도 100% 징그러울 뿐. :) 그렇다보니 마지막 재판 부분에 이르면 나 역시도 완전히 경찰 편에 서서 비클리에게 죽음을(.... 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죄! 유죄!!를 외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싼 변호사를 쓴 덕에 재판이 비클리 의사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때의 그 고구마 한가득 먹은 느낌이란(....) 수수께끼가 없다는 한계를 안고도 이정도로 읽는 사람의 감정을 한껏 끌어올리는 작가의 솜씨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


. 참, 이 소설에서 단연 가장 잘 된 부분은 맨 마지막 쪽의 결말이고, 그 부분을 올리고 싶었지만.... 이 찌질함 충만한 주인공의 운명이, 그리고 읽고 난 느낌이 고구마 한가득일지, 핵사이다일지까지 말해버리는 건 너무한 것 같으니. 여기까지. :)




그즈음 자동차 핸들을 잡고 다른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은 오솔길이나 인기척이 없는 길을 천천히 달리며 당면한 계획의 세밀한 부분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기계적으로 운전을 하여 지나가는 사람이 인사를 해도 알지 못할 때가 가끔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여 그 일을 생각했다. 그때마다 해방된 그의 상상력이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작은 계획은 여러 차례의 반복에 의해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상을 몇 주일, 몇 달, 몇 해를 거듭하며 사건 하나하나를 검토하다 보면 마침내 그의 인내에 보답을 하여 커다란 결점이 발견되었다. 그러면 그는 그 결점을 보충하는 방법을 새로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줄리아 비클리는 적어도 12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남편에게 살해당하게 되어 있었는데, 12월 초에 이르러 마침내 그가 찾고 있던 방법을 발견했다.

- p. 154.


keyword
이전 14화가장 낮고, 가장 약하고, 가장 수척한 그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