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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이라 하기엔 마냥 귀엽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

안주 - 미야베 미유키(북스피어)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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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구로스케. 너는 다시 고독해질 게다.
하지만 이제는 외톨이가 아니란다.
나와 하쓰네는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얘야. 구로스케.

섭섭하냐.

나도 섭섭하다.

너는 또 혼자가 되겠지. 이 넓은 저택에서 홀로 살게 될 게다.

하지만 구로스케. 같은 고독이라도, 그것은 나와 하쓰네가 너를 만나기 전과는 다르다.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다. 하쓰네도 너를 잊지 않을 게야.

멀리 떨어져서 따로 살더라도 늘 너를 생각하고 있을 게다. 달이 뜨면, 아아, 이 달을 구로스케도 바라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할 게다. 구로스케는 노래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꽃이 피면, 구로스케는 꽃 속에서 놀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비가 내리면, 구로스케는 저택 어딘가에서 이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얘야, 구로스케. 너는 다시 고독해질 게다. 하지만 이제는 외톨이가 아니란다. 나와 하쓰네는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 p. 441. 안주




. 이제는 오치카에서 도미지로로 이야기꾼의 대를 이어가며 진행되고 있는 미시마야 변조괴담의 출발 선상에 위치한 소설. 첫 소설이였던 '흑백'이 오치카가 주머니 가게인 미시마야 한 켠에 마련된 흑백의 방에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괴담과 기담을 듣고, 들은 이야기를 하나씩 버려나가는 과정을 반복해가다 결국 그 끝에서 자신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이어진다면 이어진 '안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물론 아직은 과거의 사건에서 완전히 놓여나지 못한 오치카지만, 그래도 조금씩 얽매여있던 자신을 풀어주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오치카 주변에는 이런저런 선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의 이야기에 오치카도, 읽는 사람도 위로를 받는다.


. 그래서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읽고 있자면 줄거리와 느꼈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구로스케가 귀여웠었지. 자택을 떠나며 신자에몬 선생님이 구로스케에게 해주던 말이 뭉클했는데. 오치카와 리이치로 선생님의 분위기가 참 훈훈했는데, 결국 이어지지 않은 게 아쉬워 등등. 사실 미야베 월드 2막의 에도시대 괴담물은 리뷰를 쓰기 전에도 한 번씩은 읽었었는데, 워낙 읽은지가 오래되어 그런지, 아니면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였는지 그다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유독 이 책에서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부분들이 있다.




"이 마을의 부처님은 우리가 지키고 모셔야 하는 약한 부처일세. 우리는 이 손으로 산을 개간하고, 절을 짓고, 부처님의 모습을 본떠 만든 불상을 모셔왔네. 그냥 앉아서 부처의 길을 설법하기만 해서는 산골 마을의 생활은 꾸려 나갈 수 없어. 이 다테나리에서는 부처님 또한 마을의 테두리 안에서만 계시는 것일세. 나는 부처님 앞에서 무엇 하나 부끄럽지 않아!"

- p. 521. 으르렁거리는 부처




. 여러 단편들 중에서도 특히 표제작인 '안주'는 귀엽고 훈훈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오치카의 지인인 아오노 리이치로의 선생님인 신자에몬이 은둔에 가까운 은퇴생활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들어간 폐가 저택에서 까만 실뭉치 같은 귀여운 요괴 - 요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 않나 싶었다:) - 인 구로스케를 만나게 되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구로스케를 맑고 올곧게 받아들이는 신자에몬의 부인 하쓰네와, 그런 하쓰네를 따르는 구로스케를 지켜보며 신자에몬이 바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외에도 어리고 착한 심부름꾼 소년과 강하지만 하는 짓은 영 서투른 신 간의 귀여운 소동을 다룬 '달아나는 물'도 좋았고. 리이치로의 친우인 땡중 교넨보의 이야기인 '으르렁거리는 부처'도 읽고 나면 어딘지 마음을 벅차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나같이 따뜻하고 뭉클한 감정을 물씬 느낄 수 있는 훈훈한 이야기들이었다.





"자, 식초 물이다." 하고 큰 소리로 말한 다음 우물 주위의 덤불 그늘에 통을 놓고 되돌아가는 척한 뒤 그늘에 앉아 상황을 살폈다.

이윽고 통 속의 식초 물이 찰박찰박 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검은 것이 통 가장자리에서 움직인다.

- 잘 씻어야 한다.

하쓰네가 얼굴을 내밀며 말을 걸자, 그것은 통의 식초 물에 파문을 일으키며 놀라더니 천천히 미끄러져 나왔다.

"보니까 눈이 부신 기색이어서...."

"눈이 부셔?"

신자에몬은 겨우 끼어들었다.

"네. 해님을 싫어하나 보지요."

- 이렇게 혼이 났으니 이제 장난치면 안 돼.

하쓰네의 말에 그것은 "하와와" 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잖아요, 여보."

하쓰네의 눈빛은 매우 밝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는 분명해요. 그것은 어린아이에요. 아직 어린 것이지요."

- p. 396.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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