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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추리단편들로 이뤄진 코스요리를 맛보다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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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이곳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던 사람은
정원의 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었어."



"오래 전과 모든 것이 다 똑같지요.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양말을 매달고, 굴로 만든 수프와 칠면조 요리 - 두 마리가 필요해요, 한 마리는 삶고 또 한 마리는 구워야 하니까 - 반지와 독신인 사람의 단추를 넣어 만든 건포도 푸딩. 그 밖에도 그 푸딩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간답니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6펜스짜리 은화는 넣지 않아요. 요즘엔 정말 순수한 은화는 넣지 않아요. 요즘엔 정말 순수한 은으로만 만들어진 은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디저트는 옛날 그대로죠. 엘버스 플럼과 칼스배트 플럼, 아몬드와 건포도, 설탕에 절인 과일과 생강. 이런 내 정신 좀 봐, 마치 '포트넘 앤드 메이슨' 사에서 나오는 목록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요."

- p. 21.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사실 장편에 비해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은 - 특히 중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 좋게 말해서 실망스럽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뢰밭인 경우가 많았지만, 여사의 마지막 단편집인 이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우선 포와로와 마플 여사님이 나온다는 게 좋고, 거기에 각각의 이야기마다 코지물과 드라마와 수수께끼라는 각기 다른 장르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머리말에서 크리스티 여사는 이 책의 구성에 대해 '꿈'과 '그린쇼의 아방궁'과 '패배한 개'로 입맛을 끌어올리고,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과 '스페인 궤짝의 비밀'로 메인 디시를 즐기고, '24마리의 검은 티티새'로 입가심을 하는 코스 요리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내가 생각하는 느낌과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각각의 다른 이야기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은 훌륭하다. 다만 이런 구성임을 여사가 직접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해문판에서는 '패배한 개'를 이 단편집에 넣은 게 아니라 다른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실었다는 게 아쉽다.





우선 2가지 주된 요리로는 -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과 '스페인 궤짝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일품선택 앙트레로는 - '꿈'과 '그린쇼의 아방궁', 그리고 '패배한 개'를, 또한 소르베로는 - '24마리 검은 티티새를 꼽을 수 있겠다.

- p. 7. 애거서 크리스티의 머리말





. 우선 표제작인 크리스마스 푸딩은 완전히 정통적인 코지물이다. 시작부터가 다운튼 애비를 연상케 하는 전통적인 저택이 배경인데다 성대한 크리스마스 만찬이 - 굴 수프와 가자미 요리부터 시작해서 구운 칠면조와 소고기 등심을 양껏 즐기고 플럼 푸딩에 민스파이, 트러플과 여러가지 디저트들로 마무리를 한 다음 그래도 입이 심심해지면 딱딱하게 굳은 초콜릿을 한 조각 즐기는 - 공들여 쓰여져 있다. 거기다 (살짝 스포이긴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고, 아이들도 유쾌한 활약을 보여주는데다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엔 훈훈한 분위기로 끝나기까지 하니 코지 미스테리의 문법에 완전히 부합한다. 이 책이 나온 게 1960년이니, 요즘 한창 유행하는 코지물들은 이 책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 두 번째 단편인 스페인 궤짝의 비밀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모티브를 둔 드라마 장르다. 한 남자가 커다란 스페인제 궤짝 속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한 채로 발견된다. 그에게는 아름답고 사교적이어서 여러 추종자를 둔 부인이 있었고, 당연히 그녀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아름답지만 알고보니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한 부인과 그녀의 추종자와 질투에 찬 남편.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와 카시오의 삼각관계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지만 죽은 이는 데스데모나가 아닌 오셀로다. 과연 어디까지가 원작과 들어맞고 어디부터가 크리스티 여사의 비틀기일지. 그 경계선을 찾아내는 게 추리의 열쇠다.





"제가 부인께 남편이 평소에 질투가 많은 편이냐고 물어보자 부인은 그랬던 것 같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얘기했지요. 마치 데스데모나가 위험을 깨닫지도 못하고 얘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데스데모나 역시 남편의 질투심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은 질투를 경험하지도, 경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녀는 격렬한 육체적 욕망의 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영웅숭배라는 낭만적인 열정으로 사랑했고, 또 친한 친구로서 아주 순수하게 카시오를 사랑한겁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정열에 대한 그런 그녀의 면역성 때문에 그녀는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거지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지요, 부인?

- p. 164. 스페인 궤짝의 비밀




. 포와로가 나오는 꿈과 마플 양이 나오는 그린쇼의 아방궁은 둘 다 괴팍하디 괴팍한 노인을 만나 벌어지는 유머러스한 수수께끼 소품이지만, 꿈이 훨씬 더 훌륭했다. 한 노인의 외뢰를 받아 밤늦게 노인을 찾아간 포와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괴팍하고 거창한 사전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간신히 노인을 만나게 된 포와로는 노인에게 자신이 매일 새벽 3시 28분에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실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 노인이 3시 28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포와로.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이전에, 범인은 살인을 위해 대체 왜 이런 거창한 수수께끼를 만들어야만 했을까. 이상한 점에 하나하나 매달려서는 답이 나오지 않고, 직관적으로 바로 본질을 찔러들어가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풀 수 있는 수수께끼다. 나는 이런 류의 추리소설을 참 좋아한다. :)



마플 양과 레이먼드 웨스트는 정원에 있는 인공 돌산 옆에 서서 시들어진 풀포기로 가득차 있는 정원용 바구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플 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냉이, 호이초, 금작화, 초롱꽃.... 됐어,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필요로 한 증거물들이야. 어제 아침 이곳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던 사람은 정원의 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었어 - 잡초와 함께 정말 중요한 식물들까지 다 뽑아내 버렸으니까 말야. 이것으로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

- p. 265. 그린쇼의 아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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