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악이란 초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것입니다.
"난 악마를 위해서 생활해 온 사람이에요." 올리버 부인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다시 말해서, 악마를 믿는다는 거죠. 하지만, 내겐 악마가 너무 어리석게 보여요. 발굽이며 꼬리 같은 걸 갖고 있죠. 서투른 배우처럼 뛰어다니기도 하고. 물론 난 작품 속에서 종종 거대한 범죄자를 만들어 내죠 -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하니까요 - 하지만. 정말로 점점 더 어려워져요. 그 사람의 참모습을 모르는 동안은 감동을 주는 인물로 나타낼 수 있지만 - 모든 게 밝혀지고 나면 - 왠지 좀 부적당한 인물로 보이죠. 용두사미격이에요. 그래서, 공공기금을 가로챈 은행 지배인이나 아내를 죽이고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편을 등장시키는 게 훨씬 수월해요."
- p. 80.
. 이 소설에선 포와로나 마플 양 대신 일반인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대신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키워드를 제공하는 역할로 또 한 번 올리버 부인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도 왓슨이나 헤이스팅즈처럼 추리를 도와주거나 하지는 않고, 소설을 쓰다 막혀서 주인공에게 길디 긴 하소연을 풀어놓거나 수렁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면서 하는 얘기가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는,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밟는 식이었긴 했지만. :)
. 특이하게도 이 소설에는 포와로나 마플 양은 등장하지 않지만 양쪽 세계관에 나왔던 조연들이 대거 총출동하는데, 우선 포와로 쪽에선 '테이블 위의 카드'에 나왔던 데스퍼드 대령과(그 때는 소령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출세했나보다) 그 작품에서 대령과 맺어졌던 로다가 시골 마을에서 행복한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 로다의 오빠인 마크 이스터브룩이라는 인물이 이 책의 주인공이고. 그리고 마플 양 쪽에선 '움직이는 손가락'에 나왔던 데인 켈솝(해문 판에서는 '데인 켈드로프'로 나온다) 목사 부부가 나온다. 즉 포와로와 마플 양의 세계관이 겹쳐진 첫 크로스오버 작품인데, 그렇다 해서 조연들끼리 포와로나 마플 양의 안부를 늘어놓는 촌스러운 짓을 하지는 않는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이었다면 이름이라도 한 번 언급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을텐데. :)
최면술이며 하얀 수탉, 화로, 별 모양 무늬, 부두교, 거꾸로 세운 십자가 - 모든 게 어리석은 미신가를 위한거죠. 그 근사한 '상자' 역시 현대인을 속이기 위한 또 다른 허튼 수작이었습니다. 요즘 사람은 영혼이니 마녀니 주문 같은 건 믿지 않아도, '광선'이니 '전파'니 심리적인 현상 같은 것에 이르면 속기가 쉽지요. 하지만, 그 상자도 전기 장식과 색깔 있는 전구, 그리고 붕붕 소리를 내는 진공관을 조립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우린 매일매일을 방사능 낙하물질과 스트론튬 90 같은 공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인 얘기에 따른 암시엔 속기가 쉽죠.
- p. 266.
. 그런 점도 있어서인지 포와로나 마플 양이 나오지 않고 추리로도 그냥저냥인데 의외로 읽고 있으며 꽤 재미있다. 오히려 S급 탐정이 나오지 않고 일반인 탐정과 경찰이 서로 한 건씩 공을 올리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식이라 고차원의 추리가 나오기는 힘들다보니 오히려 쉽게 읽히는 이야기가 나온 셈. :) 갑작스런 병에 걸려 죽게 된 여자의 임종을 지켜보고 돌아오는 길에 살해당한 신부의 구두에서 종이쪽지가 발견되는데, 그 쪽지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이 병에 걸려 죽었다는 걸 알게 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한편 주인공 마크는 저주로 사람을 죽여주는 대신 비싼 보수를 받는 영매들의 소문을 알게 되어 그 진상을 추적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 경찰에는 장애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다니는 걸 봤다는 신고가 들어오고, 이 세 가지 사건이 조금씩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로 얽혀간다. 복잡한 트릭은 없지만, 아기자기하게 사건이 진행되는 맛이 있고, 덕분에 이 정도 사건이라면 나도 추리해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장점. 굳이 힌트를 제시하자면, '있을 수 없는 것을 전부 배제하고 남은 것이 진실이다.' :)
. 뿐만 아니라 올리버 부인이 끌고 나가는 잡담 부분도 재미있다. 집필이 벽에 부딪치자 주인공에게 전화해 어마어마한 길이의 독백과 고뇌에 찬 하소연을 늘어놓는 중에 등장인물부터 트릭까지 일거에 짜내고 혼자 만족해서 전화를 끊어버리는 부분도 꿀잼이었고,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악에 대한 올리버 부인의 통찰력 있는 이야기 역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그런 활약을 보면, 역시 올리버 부인은 말년에 수다가 더 늘어 답답해지신^^; 크리스티 여사께서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분신 역할인가보다. 사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에 비해 마플 양은 그렇게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다. 마플 양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왔다면 알겠지만, 작품에 따라선 의외로 진중하신 게 마플 양이기도 하니까!!! :)
" - 이해할 수 없는 건 - 늘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어떻게 영리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대범죄자라면, 우린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악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죠." 르죄느 경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악이란 초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것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범죄자는 위대해지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절대로 위대해질 순 없죠. 그는 인간 이하의 존재일 테니까요."
- p.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