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갑이다 - 미야베 미유키(랜덤하우스) ●●●●●◐○○○○
나는 두툼했던 적이 없다.
"돈, 있어요?"
"일단은 됐어. 필요하면 뺄게."
아내는 입을 다물고 있다. 주인님은 나를 꺼내 안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나는 주인님의 지갑이다.
"다녀오세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인님은 집을 나왔다. 밖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주인님의 코트가 바람에 날린다. 그러고 보니, 나는 볼 수가 없지만, 주인님의 코트는 상당히 낡았으리라.
주인님은 천천히 걷는다. 늘 그렇다. 기분이 내키지 않는건지도 모르고, 어쩌면 많이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인님은 나를 두툼하게 하기 위해 범죄자 잡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들이 물으면 늘 그렇게 대답한다.
설사 그게 주인님 특유의 쑥스러워하는 말버릇 때문이라 해도, 나는 주인님이 측은하다.
나는 두툼했던 적이 없다.
- p. 10. 형사의 지갑.
. 방송과 SNS가 일상화되면서 분명 사람들 간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가족드라마에서는 고급 저택에 고급차를 타고 명품을 든 채 우리와 똑같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사랑싸움을 하는 이들을 언제든 볼 수 있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쏟아놓으며, 인터넷 방송이나 SNS에서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 일반인들의 화려한 소비를 다룬다. 그것은 찬사일 수도 있고, 비판일 수도 있고, 때로는 가십일 수도 있지만, 이를 접하다보면 나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실제로 도달해야 하는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 그리고 그 지점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하게 된다.
. 네 개의 죽음이 있다. 죽음으로 인한 이득이 뚜렷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목표를 향해 가는 것 같았지만 무리없이 진행되는 것 같던 수사는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뒤집히고, 그동안 꾸준히 범인으로 지목되던 용의자들은 억울한 피해자로 부각되어 '스타'가 된다. 그렇게 그들은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을 먹어가며 점점 커져서 괴물이 되어가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종류의 뒤틀린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이야기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 재수생과 비슷한 인간이 쓰카다 가즈히코와 모리모토 노리코의 계획을 도와준 제삼의 공범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침묵 속에서 반장의 체중에 저항하듯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녀석이 - 보잘것 없고, 초라하고, 세상 사람들한테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패잔병이 이번 사건의 실행범일 겁니다."
- p. 326. 부하의 지갑.
. 여기까지 읽으면 좌절된 자기과시욕을 실현시키겠다는 욕망으로 범죄에 빠져드는 범인이 등장하는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대표작인 '모방범'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한 하나의 사건을 각자 다른 시선에서 다른 어투로 말하는 서술방식은 '이유'로 이어지게 되고. 무엇보다 인간에게 실컷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면서도, 결국 그 끝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군 전체를 관통하는 신념이 가득 묻어나 있는 이야기기도 하고. 사실 이야기 자체는 추리소설에 익숙하다면 무난과 심드렁함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법한 정도지만, 이 소설 뒤로 슬쩍 비쳐보이는 여러 작품들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미미 여사의 팬이라면 한 번쯤은 찾아 읽어볼만하다. 무엇보다 별로 두껍지도 않으니까. :)
나는 떨어졌다. 제외되었다 - 가즈야는 처음으로 그런 노골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내 그랬다. 직장을 옮기고 옮겨도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은 역시 가즈야에게 뭔가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제외당한 셈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그만둔 거야.'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제외되었다. 들어가보기도 전에 떨려난 것이다. 게다가 시험이다. 학교 다닐 땐 내내 우등생이었는데. 설마 시험에서 떨어지리라곤 생각도 해보지 못했는데.
가즈야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가령 그게 아무리 일그러진 것이었다 해도, 이때 확실하게 부러져버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 p. 348. 범인의 지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