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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Oct 03. 2024

마플 양, 말년의 우정을 쌓다

카리브 해의 비밀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네메시스라던가요?



   그날 밤의 소란스러운 소동이며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몰려다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래필 씨는 아무것도 듣질 못했다. 

   그는 침대에서 세상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가볍게 코까지 골면서 - 문득 두 어깨를 잡아흔드는 손길에 그는 화들짝 잠이 깼다. 

   "아니 - 이게 누구야 - 이게 웬 악마야?" 

   "그건 나예요." 마플 양은 그녀로서는 드문 일인 비문법적인 대답을 했다. "하긴 그보다 좀더 강한 표현을 써야 할 테지만 말이에요. 그리스어에 이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이 있더군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라던가요?" 

   래필 씨는 베개 위로 힘껏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마플 양의 모습 - 달빛 속에서 푹신한 옅은 분홍빛 털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그 모습은 만일 정말로 복수의 여신이 있다고 해도 그와는 거리가 영 먼 모습일 것이다. 

                                                                                                                                       - p. 252. 복수의 여신




   . 이번에는 무려 카리브 해다. 30여년 전 '목사관 살인사건'에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을 거의 벗어난 적이 없는 마플 양이셨는데(정작 10대 때에는 피렌체 유학도 하시긴 했다) '서재의 시체' 이후 작품들에서 지인들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시다가 '깨어진 거울'에서 잠깐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로 돌아온 것도 잠시. 이번에는 무려 카리브 해로 여행을 떠나셨다. 목사관 살인사건과 '화요일 클럽의 살인'부터 마플 양의 웃음벨(^^;), 아니 귀여운 조카로 등장했던 레이먼드 웨스트가 이제는 건실한 중견 소설가가 되어 마플 이모님을 휴양시켜 드린 것이다. 훈훈하고 또 훈훈하다. 조카에겐 잘해주고 봐야겠다. :) 


   . 그러나 크리스티 여사의 느낌이 그랬던 것인지, 카리브 해에 대한 마플 양의 평은 밍숭맹숭하다. 날씨는 온화하고 경치는 아름답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종려나무 종려나무 종려나무 뿐. 똑같은 풍경 속에서 흘러가는 똑같은 매일. 비슷비슷한 사람들과 끝도 없이 늘어지는 시시한 추억담. 피가 튀고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마경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에서 온 마플 양에게 휴양지의 생활은 너무나도 평화로울 뿐이다. 조카인 레이먼드 웨스트가 젊었던 시절에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이 고여있는 물웅덩이라고 생각없는 소리를 늘어놨다가 참교육을 당한 일도 있었었지만, 마플 양이 보기에는 이곳이야말로 진정 고여있는 물웅덩이처럼 느껴진다. 


   . 다행히(?) 인간의 본성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마플 양의 지론이 여기서도 통용된 것인지, 아니면 마플 양이 사건을 몰고 다니시는 건지 아니나다를까 휴양을 온 늙은 소령이 죽은 사건이 발생한다. 전날까지만 해도 마플 양을 상대로 군대 얘기를 늘어놓다가 그게 생각만큼 잘 먹히지 않자(군대 얘기와 축구 얘기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가 잘 먹히지 않는 건 어디나 똑같은가보다!!) 비장의 카드로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허풍을 떨다 사진은 보여주지 않고 어영부영 웃음으로 떼우던 실없던 소령이, 갑자기 그 밤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마플 양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는 갑자기 작은 사진 한 장을 찾아내어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살인자의 사진을 한 번 보시렵니까?" 

   막 사진을 건네려는 순간 - 소령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이 손끝을 딱 멈추고 말았다. 펠그레이브 소령은 여느 때보다 유독 박제된 개구리 같아 보이는 얼굴로 마플 양의 오른쪽 어깨 너머 그 무엇을 꼼짝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뒤 그쪽에서 사람들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 p. 17. 펠그레이브 소령의 어떤 회고





   . 하지만 솔직히 마플 양이 유일하게 외국에 나온 소설임에도 - 생각해보면 마플 양 뿐만 아니라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에서 중남미를 무대로 한 이야기는 이 소설이 유일하다 - 굳이 외국을 배경으로 할 이유가 있었나 싶다. 그동안의 아랍 지방이나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소설들과는 달리 처음에 잠깐 기후나 경치를 언급하는 걸 빼면 외국이라는 걸 거의 느낄 수 없는데다, 나오는 인물도 현지인 한둘을 빼놓고는 죄다 영국 아니면 미국인이다. 뿐만 아니라 살인의 동기도 방법도 지극히 영국식이라 카리브 해를 전면에 내놓은 제목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뭔가 이쪽에 초청받았다가 실망하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배경이 공기화 되어 있다. 


   . 유일하게 이 이야기에서 인상적이라 할 만한 점은 래필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드물게) 마플 양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나이가 많은데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지만 비상한 머리와 괴팍한 성격과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노인이다. 그동안 나왔던 헨리 클리더링 경이나 헤이독 의사와는 좀 다른 형태긴 하지만 마플 양은 래필 노인과 서로를 동료로 인정하며 우정을 쌓게 되고, 그 우정은 이후 마플 양의 마지막 출연작이자 최고의 걸작인 '복수의 여신'에까지 이어진다. 사실 이 소설만을 놓고본다면 범인은 뻔히 드러나 있고 - 꼼꼼히만 읽는다면, 대충 50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범인이 누구인지를 모를 수가 없다 - 그럼에도 범인이 드러나는 과정은 두서없고 지리하지만, 어쨌든 복수의 여신을 읽기 위해서는 이 소설을 먼저 읽고 가야 한다. 그리고 복수의 여신에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 




   그는 몸을 홱 젖히며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럴듯한 희극이었소! 그날 밤 가벼운 털실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자신이 복수의 여신이라고 하던 그 모습이 어땠는지 당신 눈으로 보았더라면! 난 평생 그 모습을 잊지 못할거요!" 

                                                                                                               - p. 270. 마플 양, 상상력을 동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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