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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Oct 06. 2024

800만의 신, 그 뒤에 자리한 800만의 어둠

속 항설백물어 - 교고쿠 나츠히코(비채)  ●●●●●●●○○○


만약 흉악한 소망이 그 땅에 가득 찬다면,
그때는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도 무언가 영향이 미치게 되는 법이지.




   마타이치가 펼치는 함정 또한 어느 것이나 요괴를 내세운다. 못다한 미련이나 안타까운 마음, 억울함, 분통, 질투, 투기, 슬픔이나 증오까지, 온갖 괴로운 현실이 모두 요괴의 소행으로 마무리되어 원만하게 매듭지어지고 마는, 마타이치의 일은 대부분 그러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번 소동은 그 반대이다. 

   요괴의 소행으로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법하고도 잔학한 사건을 일으켜, 그 죄를 남에게 덮어씌우려 드는 것이리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나 방법이 참으로 비열하다고 모모스케는 생각한다. 

                                                                                                                                      - p . 391. 후나유레이.




   . 이번 책, 무척이나 묵직하다. 800쪽에 달하는 두께에다 사이즈도 A5. 거기다 하드커버. 이 정도면 두 권으로 나누는 게 보통인데, 그러기에는 또 이야기가 마땅히 나눠지질 않아서인지 두툼한 한 권으로 나왔다. 어쩔 수 없었겠다 싶기는 하면서도 770페이지, 1kg에 육박하는 무게에 2만 2천원이라는 가격을 보니 책을 만든 분들이 생각했을 법한 감정들이 왠지 내게도 전달되는 것 같다. 그나마 이런 모험(?)에 힘을 실어줬던 건, 교고쿠 나츠히코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드는 열렬한 고정팬들 덕이 아니었을까. :) 


   . 짤막짤막하고 유쾌한 단편들이 이야기 이곳저곳을 슬쩍슬쩍 치고 빠지던 전작과는 달리 이번 이야기에서 교고쿠 나츠히코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사건을 한가운데에 세워두고 하나하나 살을 붙여나간다. 처음에는 그저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모여있는 단편집인 것처럼 시작되지만 단편이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읽는 사람은 뭔가 더 큰 흑막이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사건들은 하나로 수렴된다. 항설백물어에서 과연 이런 장르의 이야기가 먹힐지 조심스럽게 간을 보았다면, 속 항설백물어에서는 이제 그런 우려는 접어두고 거침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작가의 자신감이 보인다.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한 단계 더 난이도를 높여도 따라올 수 있을거라는 신뢰와 함께. 





   "이 세상에 저주가 있는지 없는지는 졸자가 알 수 없는 법. 하지만 만약 흉악한 소망이 그 땅에 가득 찬다면, 그때는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도 무언가 영향이 미치게 되는 법이지."

   "흉악한 소망....?" 

   "거리 거리에 피비린내가 가득하고, 어느 순간 이웃의 팔이, 다리가, 목이 집 앞에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네. 먼 옛날의 일은 모르네만, 이 태평성대에 언제 자신의 목숨이 어찌될지 모르는 삶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도 일그러지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 p. 503. 사신 혹은 시치닌마사키.





   . 그 자신감을 기반으로 교고쿠 나츠히코는 이번 편을 통해 기존의 항설백물어와, 앞으로 나올 다른 책을 잇는 커다란 밑그림을 슬쩍 보여준다.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불타 없어진 시라기쿠 궁의 잔해 위에서 마타이치는 이번에는 너구리를 퇴치하러 간다고 이야기한다(전작의 '시바에몬 너구리'). 그러고보면 전작에서도 이미 말의 영혼이 집안을 드나든다는 사건(전작의 '시오노 초지')을 해결한 후 저주로 폐허가 된 지역의 사건(본작의 '사신 혹은 시치닌마사키')을 해결하러 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여기에 어행사가 되기 전 신출내기였던 마타이치의 이야기가 슬쩍 소개되고('웃는 이에몬'), 또 다른 곳에서는 에도에 들어앉았다는 커다란 쥐와의 몇 년에 걸친 치열한 대혈투를 언급하기도 한다. 과거에서 미래로, 이미 나온 작품과 아직 나오지 않은 작품을 잇는 거대한 '항설백물어'의 세계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교고쿠도 시리즈에서도, 항설백물어 시리즈에서도 '이 세상에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작가의 말은 동일하다. 아무리 무서운 요괴가 날뛰고 괴이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아도 정말 이상하고 무서운 것은 그걸 이용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몇 번씩이고 목을 잘라가면서도 여전히 계속 살아서 이득을 누리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묻혀진 전설을 퍼올려서 이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고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스스로 끔찍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연후에 자기 스스로 그 참극을 실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타이치는 괴이한 사건들 뒤에 감춰진 인간의 마음을 끄집어내어 깨뜨리고, 때로는 이를 거꾸로 이용해서 어둠을 몰아낸다. 일본에 있다는 800만의 신 뒤에 숨어 있는 800만의 어둠을 보는 것 - 그것이 바로 교고쿠 나츠히코의 글이다.




   "어렸을 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사람을 바꾸어놓는 일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어떠한 길을 택하는지는 그분 나름이지요. 상처가 있기에 자비에 눈을 뜨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상처가 없어도 길을 벗어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좋아하고 생명을 희롱하는 길을 택하는 것은 사신에게 홀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p. 668. 사신 혹은 시치닌마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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