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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Sep 16. 2024

시대는 지나가도, 그 속의 인간은 그대로이기에

깨어진 거울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사람들은 자신이 늙어간다는, 극히 간단한 사실을 깨우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릇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은 예전같지 않다. 물론 어떤 의미에선 예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두 차례나 겪은 전쟁, 젊은 세대, 혹은 일터로 나가는 여성들, 또는 원자탄, 아니면 그저 정부에게 그 탓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기실 사람들은 자신이 늙어간다는, 극히 간단한 사실을 깨우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극히 총명한 노처녀 마플 양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소 기묘하긴 해도, 그녀는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에서 그 변화를 더욱 절실히 느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 p. 9.




   . 마플 양의 초창기 활약무대였던 고향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에서 몇십년 만에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첫 소설 '목사관 살인사건'과 뒤이은 '서재의 시체' 이후에 마플 양은 근처 마을들과(움직이는 손가락, 예고살인), 영국 여기저기를(마술살인, 주머니 속의 죽음, 패딩턴 발 4시 50분) 돌아다니시며 사건을 해결해오셨는데, 그런 마플 양이 간만에 고향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 것. 거기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서재의 시체 편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던 친구 벤트리 부인의 옛 집 고싱턴 홀이었다. 


   . 목사관 살인사건에서 30여년이 지나 쓰여진 이 소설에서, 크리스티 여사는 영국 사회의 변화를 그대로 녹여낸다. 한 때 마플 양의 조카 레이먼드 웨스트는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을 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고인 연못 웅덩이 같다고 얘기하기도 했지만, 2차 대전 후 영국사회에 불어닥친 개발과 변화는 그런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이라 해서 비껴가지 않는다. 옛 마을 너머에 펼쳐져 있던 목초지는 개발되어 그 자리에 주택단지가 빼곡히 들어차고, 그에 맞춰 마을 상점가에는 하나 둘 최신 설비를 갖춘 가게들과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온다. 거기다 그 너머에는 대규모 영화 세트장이 지어지고, 무엇보다 벤트리 부부의 저택이었던 고싱턴 홀은 완전히 리모델링되어 영화배우 마리나 그레그와 그의 남편이 입주한다. 옛 마을을 한 발만 벗어나면 그곳에는 전혀 다른 시대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마플 양은 체리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녀는 베이커 부인으로, 주택 단지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손수레를 밀며 고요한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젊은 주부층이었다. 그들은 모두 세련되고 옷을 잘 차려입었다. 또한 머리는 곱슬곱슬하게 말아 올렸다. 그들은 웃고 떠들어댔으며 서로 큰 소리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행복에 겨운 새떼들 같았다. 월부판매의 교묘한 함정에 빠져, 남편들이 모두 괜찮은 봉급을 타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돈에 쪼들렸다. 그래서, 남의 집에 가서 일이나 요리를 해주는 것이다. 

                                                                                                                                                            - p. 13.





   . 시시각각 바뀌는 신시가지와는 반대로 마플 양과 그녀가 알던 이들은 점점 늙어간다. 목사관 살인사건 때만 해도 마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디든 갈 수 있었던 마플 양이었지만 이제는 늙고 눈이 어두워져서 장기였던 뜨개질에서마저도 실수를 거듭한다. 전에는 그게 관습이었기 때문에 하녀를 두었지만, 이제는 혼자 있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가정부를 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변화를 피해갈 순 없다. 웨더비 양과 벤트리 대령은 천수를 다했고, 홀로 남은 벤트리 부인은 고싱턴 홀을 팔고 세계 곳곳에 있는 자식들과 친지들을 만나러 다닌다. 매력적이던 그리셀다는 어느 덧 중년 부인이 되었고 서재의 시체 사건 때 갓 태어났던 그녀의 아이는 자라서 기술자가 되었다. 마플 양의 곁에 여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옛 친구는 이제 헤이독 의사 정도다. 마플 양이 모든 것을 알던 시대는 그렇게 먼 과거가 되어 지나갔다. 





   세인트 메어리 미드의 구시가지 일부는 여전히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거기엔 블루보어 여관도 있었으며, 교회와 목사관, 앤 여왕 및 조지 왕조 풍의 오래된 집들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녀의 집이었다. 하트넬 양 집도 아직 거기 있는데, 하트넬 양은 마지막 순간까지 진보와 싸울 참이었다. 역시 할머니 노처녀였던 웨더비 양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그 집에 은행 지점장과 그 가족이 살고 있는데, 문과 창문을 밝은 청색으로 칠하여 저택 자체의 외관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이것은 집을 새로 사서 이사 온 사람들이, 부동산업자가 갖다붙인 '고풍스런 매력'에 수긍을 한 터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둔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욕실을 하나 더 만든다거나, 연관 공사, 또는 전기 기구, 아니면 접시 씨는 기계 등에 돈을 물쓰듯 썼다. 

                                                                                                                                                              - p. 9.





   . 그렇게 낯설어진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에서 몇십년만에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영화 촬영을 위해 고싱턴 홀에 입주한 마리나 그레그가 개최한 입주 파티에 모인 동네 사람들 중 하나가 독살당하고, 평범한 아주머니가 파티장에서 살해당할만한 동기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경찰은 피해자가 마신 잔이 원래는 마리나 그레그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사건은 마리나 그레그 살인미수 사건으로 초점이 바뀌게 되고, 이번에는 반대로 또 너무 많아진 용의자들과 계속 이어지는 죽음으로 인해 수사는 여전히 미궁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마플 양과 크래독 경감 만큼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 마리나 그레그가 지었다는 경악의 표정과 사람들 너머로 바라봤다는 뭔가를,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나눴다는 대화에 집중한다. 그렇게 이야기의 초점은 한 번 더 움직이게 된다. 





   마리나 그레그는 그 여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은 카메라 쪽을 응시하지도 않고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더못 크래독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얼굴이 어떤 표정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두려움도 없었고 고통도 없었다. 사진 속의 마리나 그레그는 '뭔가'를, 자기 눈에 보인 뭔가를 그냥 응시하고 있었는데,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이 너무도 엄청나서 신체적인 어떠한 얼굴 표정 따위로는 나타내기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더못 크래독은 이런 표정을 한 남자의 얼굴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총에 맞아 죽었었다....

                                                                                                                                                          - p. 209.





   . 긴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1950년대를 벗어나,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작가들이 거의 다 별세했거나 은퇴한 1960년대에 들어 70대가 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는 다시 한 번 명작들을 써낸다. 더 이상 정교한 트릭과 참신한 소재로 후배 작가들과 겨룰 수는 없지만, 대신 문학적이라 할 수 있을 드라마틱한 정취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그 자리를 채운다. 아무리 시대의 모습이 바뀌어도 결국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이고, 그런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한들, 마플 양 - 그리고 크리스티 여사가 나아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시간이 흘렀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에 사로잡히지 않고, 용기있게 나아가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게 이 작품을 시작으로 크리스티 여사는 '끝없는 밤', '할로윈 파티' 등 여사 후기의 명작들을 차례차례 써내고, 그런 그녀의 글은 '복수의 여신'에서 다시 한 번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의 눈길이 그녀와 마주쳤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띄엄띄엄 말했다. 

   "그녀는 - 그렇게나 아름다웠는데 - 그런데, 그렇게나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마플 양은 다시 한 번 움직이지 않는 그 모습을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을 나직이 읊조렸다. 


   "그가 말했도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이로다. 

    신이시여, 당신의 자비로 은총을 베푸소서, 

    레이디 샬럿에게." 

                                                                                                                                                          - p.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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