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시울 Oct 13. 2024

그래도, 살아간다. 그래도, 나아간다.

버트램 호텔에서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인생의 본질이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니까 말이죠.



   마플 양은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홍차와 수란, 그리고 갓 구운 롤 빵. 능란한 하녀인지라 곡물식이나 오렌지 주스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5분 후, 아침식사가 왔다. 편리한 이동식 쟁반에 배가 불룩한 모양을 한 커다란 찻단지, 크림빛의 우유, 뜨거운 물이 담긴 은제 단지. 토스트 위에는 근사하게 익힌 수란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양철 컵으로 눌러 모양을 내 속이 단단하게 굳은 그런 시시한 수란이 아니었다. 그리고 엉겅퀴 무늬가 찍힌 커다랗고 둥근 버터 덩어리. 마멀레이드와 벌꿀, 그리고 딸기 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롤 빵. 속이 종이처럼 부석부석하게 굳어버린 그런 빵이 아니라 - 진짜 갓 구운 빵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그 냄새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가 아닌가!) 그 밖에도 사과와 배, 바나나가 있었다. 

   마플 양은 신중하면서도 자신있는 손길로 칼을 찔러넣었다. 결과는 실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걸쭉하고 진한 노른자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찐득찐득한 크림 같은 노른자위였다. 정말 멋진 수란 아닌가! 

                                                                                                                                                            - p. 59.




   . 50년 전 전쟁 이전의 시대에나 즐길 수 있었던 버터를 듬뿍 바른 머핀 빵, 그리고 시드케이크와 함께 즐기는 영국식 티 세트, 훈제 정어리와 콩팥에 햄과 마멀레이드, 벌꿀과 수란으로 식탁을 가득 메운 아침식사. 이야기의 시작은 요즘의 코지 미스테리 물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다. 전작에서는 일껏 카리브 해까지 가셔놓고 날씨나 경치는 좋지만 지루한 곳이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마플 양이지만, 그런 마플 양도 드라마 '다운튼 애비'에서 볼 법한 그 시절 대저택의 삶을 재현한 버트램 호텔에서 즐기는 호캉스(^^;)에는 백퍼 만족하신다.


   . 음식 뿐만이 아니다. 광택나는 붉은 벨벳 천으로 장식된 중앙 라운지의 커다란 석탄 난로(다운튼 애비의 맨 첫 장면에서 데이지가 사고를 치는 그 난로다), 난로 옆의 놋쇠 석탄통, 문장이 새겨진 은쟁반에 찻주전자를 포함한 은제 티 세트, 마호가니로 만든 큼지막한 옷장, 거기에 당당하고 꼿꼿한 풍채의 도어맨과 장밋빛 뺨을 한 채 생글생글 웃는 메이드, 그 시절의 옛 지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나이 지긋한 투숙객들까지. 이전 작품인 '깨어진 거울'에서 한평생 살았던 동네가 '신식 주택 단지'로 모습이 바뀌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마플 양이기에, 반백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버트램 호텔은 그녀에게는 더욱 반갑고 향수를 자극한다. 시설에서부터 직원과 투숙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되어 지나가버린 세월을 잡아두려 하는 곳. 버트램 호텔로 오세요. :) 





   "말씀 잘 알겠습니다." 러스컴 대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쇠락한 귀족들이며 옛날 지방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지금은 빈털터리가 된 가문의 후예들인 이 사람들 모두가 '미장센'에 불과하다는 말인가요? 

                                                                                                                                                            - p. 16.





   . 하지만 - 이런 아련함과 향수에도 불구하고, 마플 양의 날카로운 눈은 이것이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플 양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시절은 지나갔으며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버트램 호텔은 그저 과거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들인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자연스럽게 마플 양의 눈은 그 이면을 꿰뚫어본다. 그럼. 왜. 굳이. 그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무대장치를 꾸며야만 했을까. 왜 과거의 모습을 구현해야만 했을까.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 75살에 쓰여진 71번째 소설. 이제는 더 이상 젊었던 시절처럼 탄성을 자아내는 기발한 트릭을 내놓거나 시간을 분초단위로 재가면서 머리싸움을 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계속 쌓고 갈고 닦아와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풀어내어 읽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비록 한때는 긴 부진과 시행착오와 슬럼프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 끝에 서서 '설령 모든 것이 변한다해도 그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반대로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붙잡아두려 해봐야 그 속은 이미 달라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삶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75살의 여사는 계속 나아가겠다고 선언하고,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셨다. 




   "처음에는 그렇게 멋진 곳으로 여겨졌건만 - 아시다시피 이 호텔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것처럼 - 옛날 사람들이 사랑하고 즐거워했던 그런 시절의 일부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거든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에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사람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 인생의 본질이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니까 말이죠. 인생이란 결국 일방통행로 아니겠어요?" 

                                                                                                                                                          - p. 2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