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들 - 펄 벅(혜원출판사) ●●●●●●●◐○○
"너는 과연 군벌의 아들이 아니다!"
"너는 과연 군벌의 아들이 아니다!"
별안간 왕 후는 그의 떨리는 입술을 손으로도 멎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울고 싶었다. 그때 마침 언청이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울어버렸을 것이다. 언청이는 술병을 들고 들어왔다. 그 술은 언청이가 방금 데운 따뜻한 것이었다. 김이 솟아오르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 충실한 심복 언청이는 언제나처럼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왕후의 기색을 보자 얼른 탁자 위에 있는 술잔에 뜨거운 술을 따랐다.
그러자 왕 후는 그제야 입에서 손을 떼고 거친 동작으로 술잔을 잡고 단숨에 들이켰다. 따뜻한 술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는 잔을 내밀면서 조용히 말했다.
"한 잔 더 다오."
결코 그는 울고 싶지 않았다.
- 합본판 2권, p. 162.
. 전작인 '대지'가 소농에서 대지주로 일어섰다가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왕 룽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이어지는 '아들들'은 왕 룽의 아들이면서도 한 번도 흙에 닿은 적이 없는 셋째 아들 왕 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대지에서 왕 룽의 첩인 연영의 시녀 이화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이화가 왕 룽을 선택하면서 집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군인이 되었던 왕 후는, 후속작인 아들들에선 왕 룽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가지고 고향 근처로 돌아와 본격적인 군벌의 길을 걷는다. 이와 함께 고향에 남아 각각 대지주와 거상이 된 두 아들과, 왕 룽의 두 처로 옛 저택과 소박한 흙담집에 남은 연영과 이화의 이야기도 잠깐잠깐씩 등장한다.
. 사실 주인공이 퇴장한 후를 그리는 대부분의 후속작들이 그렇듯 대지에 비해 이 책의 서사는 엉성하고, 군벌로 성장해가는 왕 후의 이야기는 영 지루하다. 어렸을 적에 읽었을 때는 왕 후의 성공 스토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화적떼로부터 마을을 빼앗는 이야기나 화적단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배신을 당하는 이야기, 세력을 확장해가는 부분은 양산형 웹소설과 별 차이가 없어보일 정도로 투박하고, 전쟁과 음모와 모험을 다뤘음에도 박진감 없이 밋밋하게만 느껴진다. 펄 벅에게 이런 역동적인 이야기는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밤, 왕 후는 문득 아들의 모습이 왕 후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을 거둘 때의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아들은 전혀 달리 불그스름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침착하면서도 조용했던 모습을 많이 닮았으며, 어머니의 과묵함이 자기 아들의 입모습이나 눈매에서 나타난다는 느낌이 다른 어떤 기억보다도 뚜렷이 떠올랐다. 아들의 용모에서 막연하나마 낯익은 모습을 본 왕 후는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깊이 아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단단히 맺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합본판 2권, p. 116.
. 오히려 이 이야기는 왕 후의 전성기가 끝나고, 그가 처음에 품었던 큰 뜻과는 달리 결국 지방의 이름없는 작은 군벌로 머무르는 시점부터 매력을 띤다.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두 지역을 정복하고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해 대군벌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알리던 왕 후였지만, 전쟁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정세가 이어지거나, 내분이 일어나거나, 흉년이 드는 등 한 해 두 해 지체되던 시간은 어느 새 수십년에 되고, 혈기 넘쳤던 그는 이제 점점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아들에게 부성애를 느끼고 아이에게 꿈을 거는 평범한 아버지가 되어간다. 앞서의 피상적인 모험담에 비해 이 과정은 가슴이 찡할 정도로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내가 그런 이야기에 더 공감을 느낄만한 나이가 되었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 :)
. 그러나 펄 벅은 왕 후가 평범한 아버지로서 이정도면 됐다는 자조와 작은 희망을 가지고 그의 이야기를 끝맺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그의 아들은 왕 후의 기대를 이어받길 거부하고 그를 떠나겠다고, 그의 할아버지인 왕 룽처럼 흙에서 살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왕 후에겐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젊은 시절의 꿈과 이상, 그리고 홀로 남겨져 시골에서 이름 없는 소군벌로 늙어가게 될 자신의 모습만이 남겨지고 만다. (살짝 스포가 되겠지만) 이렇듯 그의 아버지나 아들과 달리 왕 후의 인생은 결국 실패와 좌절로 끝이 나게 되지만, 사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대부분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받아들이게 될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오히려 내겐 이 소설이 다른 두 소설보다 훨씬 와 닿았다.
"아버지하고 저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들이 아버지 같은 분을 뭐라 부르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반역자라고도 하고 화적두목이라고도 합니다. 동지들이 만약 아버지를 만나면 아마 배반자라고 욕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해요. 아버지는 시골에 조그만 땅을 가지고 있는 소군벌에 불과하니까요." (중략)
왕 후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아들의 말에 수긍이 가자 왕 후는 완전히 기력이 빠져버렸다. 방금 아들이 한 말이 그의 마음 속에서 그칠 줄 모르고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손바닥만한 땅을 소군벌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도 없는 소군벌이었다.'
왕 후는 입에 손을 댄 채 전부터 늘 버릇처럼 하던 말을 낮은 소리로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는 화적떼의 두목은 아니다."
- 합본판 2권, p. 160.